비정하고 따뜻한, 계약의 자유
현대의 대부분의 국가는 계약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계약의 자유란 우리는 누구와 어떠한 내용의 계약이라도 자유롭게 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계약을 체결할지 말지, 누구와 계약을 체결할지,
어떤 내용의 계약을 체결할지에 대해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립니다.
계약이란 혼자서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진지한 약속을 하는 것이므로 서로 누군가 제안(청약) 하고 동의(승낙)만 한다면 그 무엇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계약의 자유. 자유. 강조하지만 계약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에 한계가 없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어찌보면 너무 당연합니다.
국가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근본적인 내용에 해당하는 윤리나 정의에 반하는 내용의 계약은 아무리 당사자가 계약의 자유에 의해 체결하였다고 하더라도 무효로 봅니다. 국가는 법률을 만들 때 곳곳에 강제로라도 반드시 이행을 해야하는 규정(그래서 '강행규정'이라고 부릅니다)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강행규정에 배치되는 계약은 무효입니다. 법률의 규정에 따라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허가를 받지 않고 계약을 체결하면 무효라고 볼 때가 많습니다.
법원은 윤리나 정의에 심각하게 어긋나는 내용의 계약을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계약이라면서 무효라고 선언합니다(그래서 '사회질서에 반하는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도박자금 대여계약이나 매춘계약 등을 무효로 보는 나라가 많습니다. 물론 매춘에 관해서는 제한적으로 합법인 나라도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계약의 자유란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의사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계약의 자유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당사자에게 완전한 의사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계약을 체결하는 사람이 아직 미성년자라면 계약을 취소할 수 있게 합니다. 미성년자가 아니더라도 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계약을 제대로 체결할 능력이 부족한 자도 계약을 취소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합니다. 후견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혹은 계약을 체결할 때 중대한 점에 대해서 착오가 있었다면 일정한 요건에 따라서 취소할 수 있게 합니다. 계약을 체결할 때 상대방에 의해 사기를 당했거나 협박(강박)을 당하여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도 취소할 수 있게 합니다.
흔히 알고 있는 북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현대 국가는 경제적으로 시장경제와 경쟁체제를 국가의 운영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계약의 자유는 이 시장경제와 경쟁체제를 중대하게 뒷받침하는 법의 원리입니다.
시장경제와 경쟁체제는 인간의 문명을 발달시키고 유지하는데 매우 훌륭하게 기여하고 있는 제도이지요. 인류는 생산한 물건을 서로 교환하고 무역을 하고 이익을 남기고 그 이익으로 더 나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장경제와 경쟁체제는 매우 비정한 제도입니다.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할 위험, 경쟁에서 뒤쳐지는 위험을 근본적으로 개인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장경제와 경쟁체제를 뒷받침하는 계약의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약을 체결할지 말지, 누구와 계약을 체결할지, 어떤 내용의 계약을 체결할지에 대해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는 말의 다른 면이지요. 나는 이불을 만들어 누구에게도 팔 수 있지만, 옆집에서 만든 이불이 더 질 좋고 값 싸다면 내 이불은 팔리지 않습니다.
거래라는 건 그렇게 비정한 겁니다.
내가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거나 불리하게 체결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은
근본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계약의 자유는 휴머니즘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합니다. 나는 전국에서 혹은 전세계에서 이불을 최고로 잘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옆집 사람보다 조금만 더 질 좋고 조금만 더 값싼 이불을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용기가 있다면 조금만 더 넓혀 보시죠. 우리 동네에서 이불을 최고로 잘 만드는 정도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요? 혹은 내가 이불 만드는데 재능이 없다 싶으면, 칫솔을 만들어 팔아 보면 어떨까요? 세상에는 칫솔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도 무궁무진하니까요.
그러니 낙담하지 마세요. 그 어떤 비정함이라도 그 뒤에 숨은 따뜻함을 발견하세요. 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