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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닝피치 Feb 20. 2024

물과 기름

아무 단어 시리즈4

 너무 다른 성향인 사람을 만나면 퍽 당황스럽다. 웃음 포인트부터 도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겨우 물어본 질문에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이 훅 들어오면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날 있었던 흑역사를 떠올리며 후회하곤 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가만히나 있을걸...' 

 사실 고백을 하자면 남편과 나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다. 공통점을 생각해 보면 둘 다 사람이라는 점, 한국에 태어났다는 점, 털북숭이라는 점 정도?  하지만 차이점을 쓰자면 끝도 없다.




그는 운동을 광적으로 좋아한다. 그리고 즐겨한다.

나는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걷기 외 운동은 잘 안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에너지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충전한다.

그는 카페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카페에 가는 걸 무척 좋아한다.

그는 파스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파스타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겁이 별로 없다.

나는 겁이 매우 많다.

그는 범죄 스릴러를 좋아한다. 

나는 로맨스코미디를 좋아한다.

그는 격투를 좋아한다. 

나는 격투를 별로 안 좋아한다.

그는 잠이 별로 없다.

나는 잠이 많은 편이다.

등등...




이렇게 다른 사람과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20대 초, 막연하게 미래의 짝이 생기면 '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함께 커피 마시고 싶어.'  '로맨틱코미디 영화를 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어.' 환상을 가졌던 나였으니까. 하지만 현재 내 옆엔 범죄스릴러를 좋아하고 가라데와 격투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전혀 다른 성향의 남자와 7년 넘게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으니 이런 내가 신기하기도 하다.


  다른 성향의 사람과 살면서 느낀 가장 큰 장점은 그 사람의 행동이 나에게 신선함을 준다는 점이다. 확연히 다른 두 세계가 만나면 서로 나눠야 할 재료들이 풍부하다. 물론 의견이 자주 대립하지만 의사소통 기술을 연마하면 싸움이 아닌 대화를 불꽃 튀기게 나눌 수 있다. 이런 대화는 꽤 흥미롭고 일상의 자극이 된다. 내가 생각했던 패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다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화가 났을 때 더 큰 화로 번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만약 나와 비슷한 사람과 함께 산다면 내가 화를 낼 때 그 사람도 화를 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나 자신을 거울로 비쳐보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 좋을 때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미숙한 행동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다행스럽게도 서로 다름으로써 내가 화가 갔을 땐 그는 괜찮았고, 그가 화가 났을 땐 내가 참을 만했다. 똑같은 지점에서 화가 났다면 이미 우린 활활 타서 재로 변했을 것이다.


비록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가지 못해도, 로맨틱 코미디의 낭만을 나누긴 어려워도 이제는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한다고 해서 좋은 관계도 아니고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함께 한다고 해서 나쁜 관계도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15년 동안 서로 잘 아는 사이로 발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꺼이 만족스러운 요즘이다. 물과 기름이었던 사이도 충분히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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