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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민우 May 23. 2018

아픔이 지나간 자리에

아프고 난 뒤에 우린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다


미국 한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인 제인 엘리엇은 어느 날 28명의 백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진행합니다. 엘리엇은 아침 조회시간에 아이들을 자리에 앉힌 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반에는 파란색 눈을 가진 친구와 갈색 눈을 가진 친구가 있어요. 여러 분은 몰랐겠지만 사실 파란 눈을 가진 친구가 갈색 눈을 가진 친구보다 더 똑똑하고 우수하답니다."


엘리엇은 아이들에게 이를 충분히 설명한 후에 아이들을 구별할 수 있게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의 목에 작은 목도리를 감아줍니다. 그리고 두 아이들을 차별하기 시작합니다. 파란 눈을 가진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5분 더 쉴 수 있고 운동장에 있는 놀이기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또한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은 파란 눈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없다는 규칙도 만듭니다. 그렇게 눈 색깔의 다름을 기준으로 아이들을 구분하고 차별하자 아이들의 행동에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파란 눈의 아이들은 갈색 눈의 아이들을 무시하기 시작하고 갈색 눈의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주눅 들고 매사에 소극적인 아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위 실험은 미국에서 <A Class Divided>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차별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 실험은 우리에게 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엘리엇은 어느 날 다시 아이들을 앉혀 놓고 이야기합니다.


"이전에 선생님이 이야기한 건 거짓말이었어요. 사실 갈색 눈을 가진 친구가 파란색 눈을 가진 친구보다 더 똑똑하고 우수하답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규칙을 바꾸도록 해요."


엘리엇의 말에 따라 파란색 눈을 가진 아이들과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의 위치는 역전되고 맙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이전에 차별을 경험해본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은 위치가 역전되었음에도 파란색 눈을 가진 아이들에게 훨씬 너그럽게 행동한 것입니다. 이전에 차별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친구들이 받을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아픔이 우리에게 남기고 가는 것이 비단 상처뿐은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아파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은 무책임합니다. 이 말에는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에 대한 이해도, 공감의 노력도, 배려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우리와 같은 아픔을 지나온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끌어안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다음에 같은 아픔을 겪게 될 누군가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아파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픔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 꽉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항상 궁금했습니다. 왜 약자를 돕는 건 대개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약자들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간단한 이유였습니다. 그들도 똑같은 아픔을 겪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내성적이며 자존감도 낮습니다. 부유하거나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오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종종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실들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스스로를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파하고 고통받았던 시간들 덕에 제 시선이 좀 더 낮은 곳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제게 남기고 간 것입니다. 


아픔은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이지만 그 아픔이 지나간 뒤에 뒤 돌아서 누군가를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리라 믿습니다. 그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리고 아파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어린 손자에게 할머니가 알려주려 한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니었을까?
― 이기주, 『언어의 온도』 中

참고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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