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같다.
이게 내가 평소에 듣던 말이다. 덩치는 또래 아이들보다 큰 편이었고 피부도 까무잡잡했고 행동도 좀 느릿하고 눈치가 없어서 그런 건지
내 학창 시절 별명은 “흑곰”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 눈에 띄지 않고 그냥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있는 애였다.
사람들 앞에만 서면 돌처럼 굳어버리곤 했던 나이기에
발표는 물론이고 반장 선거 같은건 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고등학교 시절 영화 연극 동아리였다는 건 좀 웃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초등학생 때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는 뭐 다들 그런 말을 하니 따라 했고 중학생 때는 만드는 것이 좋았기에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런데 막상 진학하고 나니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누군가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반사적으로 엔지니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여름 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학교에 왔을 때
친구 중 한 명이 학교에 있는 연극 영화 동아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랑 같이 웃고 떠들던 애가
나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런 동아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좀 놀랐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았다는 것이 내심 부러웠고 동시에 흥미가 생겨 가끔 친구가 있는 동아리실 근처를 기웃거리곤 했다.
관심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하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동아리 관련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꼭 연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었다.
영화와 연극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때 시나리오 작가라는 직업을 처음 들었다.
사실 글이라면 그전에도 조금씩 쓰기는 했지만, 그냥 일기나 편지 같은 것들이지 딱히 작품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아직 열기가 다 지나가지 않은 여름 끝자락에 나는 수업 시간에 몰래 적은 시놉시스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짧은 글을 공책에 적어서 방과 후 친구와 함께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아직 날이 더워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땀이 났고 마라톤이라도 한 듯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내 글을 보신 선생님이 “잘 썼네” 라고 하셨을 때의 풍경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동아리실을 나오면서 친구에게 막 자랑했고
친구는 “ 누가 써 와도 다 저렇게 말씀하셔”라고 하면서 흥분한 날 자제하려 했지만
누구에게나 그러신다면 어떠하리.
나는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 좋았고 그렇게 졸업할 때까지 그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작품이라고 할 건 만들지 못했지만, 독립영화 촬영도 짧기라지만 참여해 보았고 학교 축제 때는 연극무대에서 한 줄짜리 대사도 버벅거리면서 말해봤고 연극제에도 따라갔다.
그렇게 즐거운 3년의 학교생활도 끝이 나고 어느 순간 나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대학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성적도 딱히 좋은 것도 아니었고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포기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1년 가까이 백수로 지냈다.
낯선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해야 한다는 건 나에게 있어 꽤 힘든 일이었고 긴장한 나머지 모든 일이 실수투성이였다.
그러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1년을 그냥 쉬어버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무섭다는 핑계로 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다가 마침 집 근처 야채 청과점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보고 바로 방문해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쭈뼛거리면서 본 면접에서 “내일부터 나와요“라는 말을 듣고 오랜만에 부모님께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첫 출근날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몰라 청색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출근을 했고 후회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착해서 가게 문을 열고 준비하니 곧 차가 들어왔고 나는 거기서 감자며 고구마 등 족히 20킬로가 되는 한 번에 몇 박스씩 나르고 또 나르기 시작했다.
처음이니 무리하지 말라던 사장님의 충고를 나는 괜찮다며 박스를 들었고 어느새 땀이 비 오듯이 났고 물건을 다 내리고 난 뒤에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사장님은 다음부터 편한 옷을 입고 오라고 하셨고 그제야 나는 다른 직원분들과 사장님의 옷차림새가 눈에 보였다.
가게인 물건들을 정신없이 포장하고 나르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할 수 있는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면서 퇴근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 잠시 누웠다. 깨어보니 출근 시간이었고 온몸은 근육통 때문에 고장이 난 듯 아팠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서는 내 모습이 퍽 웃겨 보였다.
”흑곰“의 장사 라이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