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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n 12. 2024

즐거웠으며 심심했고 거룩했다

부안 마실길 7코스 - 2020. 11. 08

11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로 땅이 포근해지는 달, 낙엽이 밟히는 날이었다. 기세 좋던 넝쿨을 따라 힘껏 자라던 칡 이파리도 몇 장 남지 않은 채 가을볕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지나버린 시절을 추억하는 이파리 위로 햇살이 내린다. 저 빛이 내리는 서쪽 하늘에도 겨울이 올 것이다.

하루도 좋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땅에 대고 속삭였다. 봄날 첫걸음을 떼고 가을, 오늘까지 덕분에 좋았다고 토닥거렸다. Autume forever 그 음악을 들으면서 걸었다. 갈대가 무성한 곳에서 처음 알았다. 푸른 갈대를 보고 싶어 한 적이 없다는 것을.


2주 만이다. 길이 맛있어지는 계절 11월에 우리는 1시간 반을 달려왔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길 위에서 놀았다. 가을이 연주되는 마실길 레스토랑에서 하루를 보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서 좋았고 바로 나온 음식이 맛도 좋아서 두 배로 즐겼던 부안 마실길 7코스 아니었을까. TV에 나왔다는 왕포 마을에서 곰소항을 지나 곰소 염전까지 이어진 곰소 소금밭길을 다녀왔다.

11월 첫 주, 여기 남쪽에 단풍이 절정이다. 토요일 오후가 빛이 난다. 지난번에 택시 타고 돌아갔던 변산 중학교도 반갑고 갯벌에서 나는 갯내음도 정겨웠다.

그곳에 가을 물이 짙어가고 있었다. 여기 마실길 7구간은 해찰하기 더 좋다. 바다를 보고 걷다가 내변산으로 뻗어 내린 긴 산줄기에 시선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정말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줄도 모르고 걷는 길이야말로 위험할 텐데, 그만한 재미도 없다. 어떤 길을 걷고 있었는가, 그것이 늘 중요하다. 마실길에서는 길이 하나로 나 있어서 나처럼 길을 잃거든 바다를 따라 걸으면 된다. 바다가 길을 일러준다.

흐린 늦가을 하늘이 정다웠던지, 내소사 가는 길이었다. 이쪽으로 가면 절이 나오고 저기 멀리 보이는 곳으로 가야 곰소항이 나온다. 전나무 숲길을 따라 걸었던 어느 해 가을도 생각나고, 어느 해 겨울도 떠올랐다. 그 가을에는 어머니도 같이 걸었었고 그 겨울에는 누구였을까. 누가 눈 내리는 산사에 찾아갔을까. 이쪽으로 누가 걸어갔을까.


살살 걸었다. 길눈이 서툴다고 탓하는 사람도 없어서 한가롭게 걸었다. 우리 식구들은 길을 잃은 것도 모른다. 그저 걷고 있다. 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답해야 할까, 설핏한 마음이 가을 들녘을 닮았다. 재촉하지 않고 탓하지 않는 그림자가 점점 들판을 따라 길어졌다. 고맙다, 사람들아. 걷게 해 줘서 고맙다, 사람들아.

그대도 나와 같기를, 길을 잃은 그대에게도 갯내음이 날아들기를. 솔향이 덤벼들고 길어깨가 춤을 추기를. 석양이 말 걸어오고 바다가 넘실대기를. 그래서 결국 일어서기를, 길에서 우리 알아볼 수 있기를.


날마다 채우는 것이 배움이고 날마다 비우는 것이 도가 된다 - 爲學日益 爲道日損 -는 노자의 말씀을 땅에다 다시 쓴다. 비움과 채움이 모두 길에 있다. 날마다 배우고 날마다 도를 이루는 것, 그것이 걷기다. 한결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곰소항에 섰다. 절정을 지나 결말을 예비하는 대목 앞에서 결연해지는 주인공 같았다. 다음 길을 걸으면 여기가 끝난다. 올 한 해는 서쪽 바다를 거닐었구나. 그것은 운명이었을까. 선택이었을까.

길에서는 생각이 날아갔다가 돌아오고 돌아와서는 또 밖에 나갈 생각만 한다. 잠깐 내게 생각이 기대는 사이에 얼른 정리 좀 하자.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1코스부터 순서대로 길을 따라 만났던 인연들에 경외와 감사가 솟았다.

서로의 사연을 알아보는 사람들끼리 말없이 나누는 동정이나 순수 같은 것들이 마실길에 있었다. 나도 우리 아이들도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좋은 발판이 하나 생긴 듯하다. 거기를 구르면서 폴짝 뛰어오를 것 같다. 시간이 마련해 준 구름판, 용기를 내어 그 구름판을 밟고 뛰는 것이다. 봄부터 내내 수고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니까 길마저 소중해진다.


토요일 하루 즐거웠으며 심심했고 거룩했다. 바다에 떠 있는 그 조그맣던 빨간 것을 등대라고 불러도 좋다면 거기 불이 켜지는 것이 보고 싶다. ㄱ자로 꺾이는 길에서 강이가 노트패드를 꺼내 들었다. 머리를 뒤로 묶고 열심히 게임을 한다. 잠시라도 그 틈으로 저 하고 싶은 것에 빠진다. 좋아하는 것은 그렇게 챙기는 것이 사람이다. 길을 가방 속에 넣어줄 수도 없고 어디에다 챙겨줘야 할까. 웃음이 났다. 내 웃음을 아이는 모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너를 챙겨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마도 오래오래 모를 것이다.


우리는 어느 별에서 만나기로 했었던 사람들이 맞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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