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처럼 11시간전

구이 저수지 둘레길

어떻게 키워내기로



출발하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 기억할까.

- 그러고 보니 부안 마실길 걸은 게 엊그제 같으면서 한참 예전 일 같기도 하고 그래.

- 이렇게 잠시라도 나서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 사실 마실길도 거의 1년에 걸쳐 다녔었잖아. 날씨가 더워지면 못 가고, 약속 때문에 못 가, 뭐 시험 보느라 못 가.

- 정말 그렇다니까요, 마음먹고 나가는 것도 어렵고 애들도 크면 잘 따라다니지 않는다잖아요.

엄마하고 아빠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너희는 뒤에 앉아서 무슨 장난을 쳤을까.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밖이 좋았냐고 이제야 물어본다. 엄마나 아빠는 너희가 곧 다 커버릴 것을 많이 예상하고 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이렇게 넷이 다니다가 둘만 걸어도 심심하진 않을까, 그때 지금이 퍽 그리워지면 그것은 쓸쓸함일까, 그리움일까, 젊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대신 우리에게는 상념이라든지 기다림을 기다리는 기다림 같은 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빠와 엄마는 이런 식으로 빛을 받고 있다. 아껴 써도 아껴 쓸 수 없는 빛을 아까워하고 있다. 너희는 뒷자리에서 자라고 우리는 앞에 앉아서 일요일 오후를 반짝 널어놓고 있었다.

코로나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지도 못하지만 모처럼 어디를 좀 다녀왔어도 뒷맛이 개운하지 못하다. 내내 조심하고 신경 쓰면서 다니면 다리보다 정신이 더 피곤해진다. 언덕이 나오면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 반복하면서 숨을 고른다. 매번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일은 미안하고 불편하다. 그렇게 우리는 또 걸었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어서 땅은 축축했고 습도가 높았다. 그나마 덥지 않았고 데크로 만든 산책로 덕분에 저수지를 옆에 끼고 걸을 수 있었다. 그 생각이 자주 났다.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느라 멈추어 설 때마다 그 생각이 났다. 코로나 이후에 마스크 없는 세상이 되어도 사람끼리 스치고 지나치는 일이 그전처럼 아무렇지 않은 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봄에 여기를 두 번 찾아왔었다. 어디를 가볼까 망설이다가 무작정 찾아온 구이 저수지는 생각보다 첫인상이 좋았다. 이른 봄, 호수 위로 부는 바람이 차가워서 겨우 주변을 서성거리다 돌아가면서 저 길을 한번 걸어보자고 뜻을 모았었다. 그 뒤로 다시 한번 봄이 다 지나기 전에 찾았었고 그때도 호수를 따라 두 시간쯤 걷다가 돌아갔다. 한 바퀴를 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니까, 중간쯤 가면 계속 가야 되는 줄 잘 아니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하루 날을 정하고 소풍을 가듯 그렇게 가방을 챙겨서 오래 걷기로 했다. 그게 지난 봄날이었다. 바람이 출렁이는 봄날이었고 억새 대신에 갯버들이 흔들거렸으며 많은 날들이 달력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출발, 그런 느낌이 가득했었다.

잠시 무엇 때문에 잊었을까. 아니, 잊기는 했었던가.

우리는 여기 말고 군산 호수를 벌써 몇 번인가 걷고 돌았다. 이제 두 곳을 다 돌아보고 말하자면 군산 호수는 더 넓다. 완만하며 쉼터가 되기에 적합한 것들이 더 많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그리고 또 나에게 주문한다.

무엇이라는 대상을 따지는 일에 앞서서 어떻게라는 접점을 떨어뜨리지 말고 몸에 지니고 다니기 바란다. 무엇을 해줄까 궁리하는 일은 무엇에서 끝나고 말지만 어떻게 해줄까 생각하는 일은 무엇도 담고 계절도 담고 사람도 다 담아낼 수 있는 주머니가 되는 일이다. 그러고도 손이 들어갈 만큼 언제나 넉넉한 주머니다. 어느 호숫가든 나에게는 월든 호수가 되고 정지용의 호수가 된다면 그것 참 부러운 일이 될 것이다.

희망 / 루쉰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아빠는 희망을 호수에 띄워본다. 너희는 오늘도 사이좋게 걷고 있었다. 구름이 몰려가는 거기에 무슨 재미난 사연들이 살고 있을까. 이렇게 걷고 있으면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같다. 알프스 소녀 하이네 같고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처럼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마리 갈매기 같다.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이 빈칸으로 남아있는 일기장이니까. 우리는 오늘 일기를 썼다. 두 발로 꼭꼭 눌러서 썼다.

호수 1 /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밖에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를 살기로 하자.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고 그것이 되느라 다 태우지 말고 다만 어떻게, 살풋한 그 마음을 보듬어 주기로 하자. 살펴가기로 하자. 보고 싶은 것을 보러 가고,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멀리 바라보는 어떤 '어떻게'는 어떨까 싶다. 그것은 걱정도 궁리도 아닌 채 너에게 너에게 다가가는 일이 되도록 하자. 내게 누구냐고 묻는 사람은 나를 무엇으로 볼 것인지 어떻게 볼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한 사람이듯이 세상을 대하는 우리는 그의 깊은 속을 묻자. 이름표나 붙들고 씨름하지 말고 그렇게 가볍게 통성명하는 일도 가볍게 넘어가 주고 우리는 그의 너른 가슴팍에 우리의 가슴을 묻어놓고 생명을 키워내자. 어떻게, 어떻게 키워내기로 하자.

구이 저수지 수변로를 걸었다. 다른 때보다 많이 멈춰서 숨을 고르고 땀을 닦았다. 어디쯤에서는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신발을 신고서 발을 적시며 웃었다. 얼굴도 씻었다. 우리는 어떻게 또 걸었다.

이전 03화 남은 길 4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