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질수록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6월 24일 밤, 주홍빛이 감도는 불빛 아래 아내와 마주 앉았다. 하루가 길었다는 표정이다. 어제 비가 내리더니 공기가 차분해졌다. 살갗에 닿는 밤 기운이 청량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틈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지, 여름이 힘든 것은 밤에도 식지 않는 열기 때문이다. 곧 7월인데 올해도 역시 최고로 무더울 것이라는 예측이 무성하다. 이 시원한 것을 어디에 아껴두었다가 숨 막힐 듯 더울 때 꺼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조금 지나면 바람 한 줌이 아쉬워질 것이 눈에 선하다. 여름이 바짝 다가왔다.
작년 여름 그러니까 가장 더웠던 7월 마지막 날에 둘레길에 다녀오고 둘 다 아팠다. 그나마 내가 하루 먼저 털고 일어났지만 아내는 나머지 휴가를 끙끙 앓다가 다 보냈다. 둘이 방에 누워서 '나이'를 탓하면서 여름에는 이렇게 다니면 안 되겠다고 무슨 동지애처럼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날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겁이 없었다. 오고 가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요량으로, 그리고 아쉬운 대로 휴가 기분을 내보려고 이틀 동안, 10, 11코스를 걸을 생각이었다. 방금 일어난 아내 얼굴이 반쪽이다. 다이어트, 다이어트 그러더니 어제 하루 고생한 탓에 핼쑥해졌다.-
사람에게 많은 신기한 것들이 주어졌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은 생각할수록 특별하다. 액체에 섞여 있는 작은 입자를 거를 수 있는 종이, 어렸을 때 봤던 그 거름종이! 기억은 그렇게 내 안에 남은 입자들이다.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이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간은 물처럼 나를 빠져나가 이별을 한다. 한때는 나를 살렸던 물이 나를 거쳐서 흘러가야 또 내가 산다. 나를 떠난 기억들은 누구의 기억이 될 수 있을까. 내게 남은 공깃돌 같은 기억들을 만지작거리는 저녁 무렵에는 가볍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나이 들어가는' 이가 기댈 곳이 아닌가 싶다.
물은 그래서 맑아야 한다. 매 순간 맑은 물이 나를 흘러가기를 두 손 모은다. 물로 씻어내고 그 물이 흘러간 나는 물이 남긴 입자이며 조각이며 사람이다. 삶은 그렇게 조각을 남긴다. 누구의 삶이든 흘러가고 있다. 그 조각에 밤바람이 스치고 별빛이며 달빛이 내린다. 그 위로 계절이 오고 가고 거기에 인연이 칭칭 감긴다. 나 하나를 남기고 지나간 것들에게 내가 보냈던 인사에는 무엇을 담았던가. 무엇을 거기 놓아둘까. 내게 남은 기억으로 나는 매일 내가 된다. 어제 남은 기억이 오늘 나를 만들고, 오늘을 산 내가 내일 다른 내가 된다. 그것으로 산다.
7월 5일까지 산이는 시험이 끝나는데 강이는 그 주 지나고 화요일까지 기말시험이다. 일단 불리하다. 산이도 무척 피곤해라 그러는데 당장 시험 끝나고 그다음 날 산길을 걷자고 하면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바람이 소슬 거리는 것이 가을밤처럼 운치도 있다. 뜻 없이 곰곰해지는 것이 재미있다. 손으로 치댈수록 눅진하고 차지는 밀가루 반죽처럼 '어떤 일'을 먹기 좋게 매만지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스물한 개 구간 중에서 이제 네 개가 남았다. 16코스 가탄에서 송정 11km, 17코스 송정에서 오미 10.4km, 20코스 방광에서 산동 13km, 그리고 마지막 21코스 산동에서 주천 16km.
남들 쉴 때 쉴 수 있는 일상이 아닌 탓에 네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하루를 찾기가 쉽지 않다. 7월 7일에는 장모님 팔순 잔치가 있는 날이라 빠질 수 없고 그 주가 지나면 다시 주말이 바빠진다. 한여름에 휴가 대신 길을 걷는 것은 어쩐지 피하고 싶고 올해는 둘레길을 끝내고도 싶고······
추석 연휴에 제일 힘들어 보이는 가탄-송정 구간을 걷기로 아내와 일찌감치 정해놓았다. 10월 아이들 시험 끝나면 하루 걷고 그러면 두 구간이 남는다. 그래서 이번 7월 6일에 길 하나를 걸어야 한다는 계산이다. 마지막 산동에서 주천 구간은 아껴뒀다가 12월 올해가 가기 전에 피날레로 걸을 생각이다. 5년 걸려 길 하나를 잇는 모습을 상상하면 -우습겠지만, 우리 딴에는 - 감개무량하다. 4학년 6학년 짜리 꼬마 둘을 데리고 내내 같이 걸었던 길이라서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특별한 일도 없다. 아이들이 흘렸던 땀방울을 어떻게 그냥 흘려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책으로도 엮어줄 생각이다. 정말이지, 걸으면서 컸구나 싶은 시간이었으며 물처럼 우리를 흘러간 세월이었다.
날짜를 정하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7월 6일은 보류할까 싶다. 산이는 아마 눈도 뜨지 못하고 잠을 자야 할 것이다. 강이도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그 아이들을 끌고 가는 것은 억지스럽다. 아내와 나, 둘이서 걸어볼까 싶지만 어쩐지 둘레길을 다 같이 걸어야 할 길이 되었다. 세월을 같이 보낸 사람들끼리 느끼는 아련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 이 길을 걷겠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 그 길은 기억될 것이다. 우리 안에 남아서 우리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만나는 우리들은 늘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세월이 훨씬 더 지나서 엄마나 아빠가 별빛처럼 아스라해도 속삭이면서 자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 와 가는데 왜 이렇게 망설일까. 나는 기다리는데.
송창식이 부르던 그 노래를 나도 가을 둘레길에서는 불러봐야겠다. 많이 시원하고 많이 고맙고 많이 아쉬울 것이다.
'손 한 번 잡아 봤으면, 조금만 더, 조금만, 천천히 걸었으면, 천천히 걸었으면, 천천히 걸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