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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n 24. 2024

첨밀밀

봄바람 속에 꽃이 피는 것처럼


띄엄띄엄 한 글자 한 글자 연필심에 침을 발라 공책에 적는 아이가 떠올랐다. 처음 글을 배우는 그 아이에게 어떤 문장이 생겨나고 있었을까. 그 문장은 어쩌다가 시詩가 될 줄 알았을까. 남자, 소군은 그렇게 홍콩에 도착했다. 제목도 첫 문장도 아무것도 모른 채 연필 하나만 챙겨서 구룡九龍역에 내렸다. 잠에서 깼다.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날, 그 첫사랑의 날을.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시절, 그 사랑스러운 때를.'

영화 속 여명과 장만옥을 보면서 스무 살에 외웠던 그 시구가 감돌았다. 입안에서 살아나는 맛, 깜짝 놀랐다. 무슨 맛이었더라 생각해도 전혀 모르겠다. 앵두, 살구, 자두, 복숭아 같은 말들이 맴돌았다. 향기가 머릿속에서 난다. 오른쪽 귀 뒤에서 번져나는 그 향기가 코로 맡아진다. 오래전 나에게로 간다.

이교, 저 이름이 그때도 마음에 들었다. 장만옥, 그녀가 미키마우스 닮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야무지게 생긴 것이 눈이었을까, 입이었을까. 한 갈래로 묶은 긴 머리만 보고서도 많은 것을 안다. 가끔은 아주 중요한 것도 알게 된다. 가슴이 뛰는····.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버린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 괴테, 첫사랑

철학자 같은 괴테의 그때는 몇 살이었을까. 괴테의 '첫사랑'은 언제였을까. 첨밀밀, 영화 제목도 달콤하고 괴테의 시도 단맛이 났다. 예전에 봤던 영화, 언제 봤는지 잊어버린 1986년 홍콩이 나오는 영화가 시작한다. 여전히 설레는 것이 좋은 작품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 웃음이 난다. 알면서도 설렌다. 두 사람이 보낼 그때부터의 10년이 나를 또 흐리게 한다.

'好像花儿开在春风里, 봄바람 속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중국 본토 톈진을 떠나온 두 사람에게 홍콩은 봄이었다. 화면마다 봄날이 가득했다. 비좁고 냄새나는 방에서도 남자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팔고 영어 학원 유리창을 닦으면서도 여자는 생기로웠다. 젊음이었던가. 첨밀밀甜蜜蜜, 꿀같이 달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까. 내 젊음에게 용서를 빈다. 웃기만 했어도, 가난해도 웃을 수 있었는데! 저렇게 웃을 줄만 알았어도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을. 꿀을 발라 그 입에 넣어줄 것을...

차를 마실 때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새 신발을 신고 밖에 나설 때도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고 라면을 끓여도 맛의 순도가 가장 높을 때가 있다. 다 사라지고 그것만 남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모으는 여자와 그 여자를 위해 모든 다른 순간이 되어주는 남자가 있다. 1986년 처음 만난 여명과 장만옥은 그렇게 보였다. 1995년 뉴욕의 한 거리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소군과 이교는 그렇게 살았다. 이교가 놓치지 않은 순간들에는 자전거를 태워준 남자가 있고 수영복을 속옷처럼 입는 남자가 있고 미키마우스를 문신으로 새긴 남자도 있다. 이교는 그 불빛들을 따라 슬퍼도 슬퍼하지 않고 자신을 잃지 않았다. 착륙하고 이륙하면서 달빛을 닮아간다.

你笑得甜蜜蜜, 그래 웃음이 꿀같이 달콤한 사람이 있다.

바쁘고 힘들어도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비가 오더라도 그 봄날에 부는 바람, 그때 부는 모든 바람이 청춘靑春인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지금 거기 있다고. 헤어지고 만나는 꽃 같은 시절,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고. 웃으니까 좋다고, 보기 좋다고 그리고 어울린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편지는 그런 것이다. 마음이 상대에게 곧게 뻗쳤을 때 거기에 닿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어디에서든 적고 무엇에든 적는다. 그때는 편지를 써야 마음을 알릴 수 있고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톈진으로 달려가던 그 마음은 길을 잃고 편지는 써지지 않는다. 써지지 않는 것을 쓰는 사람이 있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착해서 사람을 웃게 하고 착해서 사람을 울린다. 남자 소군은 괴로워하며 그리고 불행할 것을 알면서 소정과 헤어진다. 어떤 사랑은 편들기도 혼내기도 어려운 사랑이 있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에서도 만날 수 있고 有緣千里來相會,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보고 있어도 만날 수 없다 无緣對面不相逢.

시詩같은 문장이었다. 소군이 쓰는 문장에는 기다림이 넘친다. 기약 없는 기다림, 운명밖에 그를 도울 수 없는 곳으로 떠나던 남자는 자비로웠다. 자비는 자기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힘을 믿는다. 소군을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의 사랑은 슬프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 세레나데, 고급 카스텔라 맛이 난다. 단맛인지 모르는 달달함이 깃들어 있다. 웃어도 울고 있는, 울어도 웃고 있는 이상한 남자의 사랑이 잘 보였다. 그를 따라 요리를 하고 싶어졌다. 오래간만에 자전거를 타고 싶어졌다. 거기 뒤에 아내를 태우고 금강을 따라 달리면 물결이 출렁일 것이다. 달이 뜰 때까지 달리면 좋을 것이다. 오십이 넘은 사람은 가끔 이렇게 주책이 되어도 괜찮을 것이다. 멋진 영화를 보고 나와서 그런다면 다 허락해 줄 것이다.

여자의 지혜로운 눈이 눈에 선하다. 저 여자의 갈등, 저 여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쿡쿡 찌르고 저 여자의 눈물이 툭툭 떨어지며 하나의 사연, 둘의 음표, 그리고 셋에 노래가 된다. 남자는 시詩가 되고 여자는 음音을 간직하고 둘은 하나의 곡조를 이룬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를 나는 듣는다.

你问我爱你有多深 我爱你有几分,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요. 我的情也真 我的爱也真, 내 마음은 진심이에요, 내 사랑은 진심이에요. 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이에요.

테레사 텡, 마흔두 살에 세상을 떠난 등려군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듣는다. 어떤 사랑을 하는가, 의리가 돋는 사랑도 있을 것이고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결국 마주치는 운명 같은 사랑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밝았으면 한다. 그랬으면 한다. 어디서든 빛이었으면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이와 같음을 깨달아라. 밝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호수에 들어가는 일이 없지만 맑은 물 위에 비치고 있음을 깨달아라.' - 사마디라자수트라 中

* 한용운 님의 침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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