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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01. 2024

8월의 크리스마스

그것은 담담함인지도 모른다


1998년은 예보에도 없던 비바람이 몰아쳤던 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밀고 밀리면서 삽시간에 이 땅이 위험해졌다. 어디선가 비명이 들리고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쓰나미가 나라 전체를 덮쳤고 사람들은 그것을 IMF라고 불렀다. IMF 때문에, IMF라서, 회사나 기업의 인사채용 담당자들도 긴장한 얼굴로 그 말을 첫인사로 대신했다. IMF라는 두꺼운 장편소설의 인상적인 등장이었다.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강요되었다. 누구나 IMF라는 제목을 떠들었다. 가는 데마다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저마다 전문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 책을 던져놓고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아마 전쟁터에서도 나는 멍하니 지켜볼 것 같다.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총알이 파파팟, 땅을 파헤치며 파고드는 것을 두려워하며 거기 누우면 죽겠구나, 그러고 있을 것 같다. IMF 때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다.

웃음도 코미디도 한순간에 다 어색해지고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조소와 조롱과 희화가 그리고 후회가 곳곳에서 나부꼈다. 코로나 사태를 경험한 학생들은 시간이 지나서 '코로나' 그러면서 자기들의 시대를 이야기할 것이다. 마스크, 마스크! 그러면서 정말 그랬다며 회상에 잠길지도 모른다. 3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IMF라는 시절은 전혀 웃음의 소재가 되지 못하고 -마치 썩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 아직도 멍울처럼 만져진다. 통증은 없고 기억만 남아 있는 몽우리가 잡힌다.

'8월의 크리스마스'

다시 봐도 같은 장면에서 멈춘다. 그리도 제목이 생뚱맞아서 잘 됐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는 제목에 끌렸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하루키'가 썼던 제목이란 것도 다 알고 영화 속에서, 어떤 대목에서 어떤 뜻으로 제목을 뽑았는지 절대로 추적하지 않는다. 심은하가 예뻤다는 말도 한석규도 젊었다는 말도 신구가 하는 연극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저기 초원 사진관 앞으로 가서 '정원'이가 살던 집까지 걸어봤으면 싶고, 저기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면 두 바퀴쯤 달려보고 싶어 질까····

운동장에서 시작하고 운동장으로 끝나는 것이 비단 영화만은 아니다. 나도, 그대도 지금 운동장이다. 나는 한석규처럼 앉아서 달리는 수많은 그대를 보고 있기로 한다. 그대들이 집으로 돌아가 운동장이 텅 비면 그때에 혼자 달려보기로 한다. '다림' - 심은하가 주차 단속 요원으로 나오고 그녀의 이름은 다림이다. - 같은 여자를 만난 적 없는 나는 행운인가, 불행인가. 만난 적 없어서 그마저도 따질 수 없는 것을 묻는 나는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못하다. 왜 만난 적 없겠나, 어째서 못 만났겠나. 다 만나고서도 만나지 못한 것처럼 '그런 척' 하는 것이지. 세상의 여자는 심은하 같은 구석이 있고 세상의 남자는 한석규 같은 데가 있는 법이다. 두 사람이 마주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진짜 '영화', 그러니까 우리는 '영화'를 살지 못한 탓에 아무도 한석규처럼 심은하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영화일 때, 내가 하는 말이 대사가 되고 그대의 표정이 연기가 되어 꽂힌다. 우리를 바라보는 다른 그대들에게 화살처럼 날아간다. 예전 영화를 다시 보는 까닭은 내 삶이 영화 같기를 소원하던 늙은 영국인 교수의 눈이 잊히지 않아서다. 너는 영화일 수 있잖아, 그랬던 마지막 수업이 아직 내게 남아있어서다. 돌아가셨을까.

담담하다는 말을 98년도에는 볼 수 없었다. 이제는 그 말을 담담하게 받아 적을 수 있다. 그릴 수도 있을 거 같다. 있었지만 없었던 것들을 챙길 수 있어서 예전에 봤던 것들에 정이 간다. 영영 너를 몰라볼 뻔했다고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어서 나도 다정해진다. 이불을 둘러쓰고 소리를 죽여 우는 남자에게, 그 울음을 밖에서 혼자 듣고 서 있는 아버지에게, 열 번을 기다렸다가 편지를 쓰기도 했다가 결국 유리창도 쨍 깨뜨려버리는 여자에게, 다 전하지 못하고 상자 속에 묻어둔 그 여자 다림에게 보내는 남자 정원의 편지에게도 담담해서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고, 나는 그렇게 어른스럽지 못했다고.

- 초저녁의 달콤한 첫 잠 속에서/ 당신을 꿈꾸다 일어납니다/ 바람이 나지막이 불고/ 별들이 찬란히 빛날 때/ 당신을 꿈꾸다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발은 신들인 듯 날 인도해/ 당신 창가로 데려왔습니다. 님이여!//

인디언 세레나데를 대신 편지에 적었던 날, 급하게 무엇인가를 적어야 했던 그 순간에 떠올랐던 것이 하필 인디언 세레나데였다. 겨울 햇살이 잠시 눈부셨던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 92년 1월 1일. 그 편지는 어디에 닿았을까. 일병이었다. 전방에 있는 보병 부대, 생각지도 못했던 종교 행사 참여 사역이었다. 종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날 쉬는 것만큼 달콤한 것이 없다. 그래서 사역병 호출이었다. 얼마나 운이 좋냐고 속으로만 외쳤다. 대대에서 겨우 두 명이 사역병으로 성당에 갔다. 창으로 빛이 내리는 성당 안에서 편지를 썼다. 순전히 갱지 한 장이 눈에 보였던 탓이다. 봉투도 없고 주소도 없이 학교와 이름만 있는 그 편지를 사제관에서 근무하던 군종병은 정말 부쳤을까.

- 어둡고 그윽한 강물 따라서/ 살랑이는 바람이 사라집니다/ 꿈의 아련한 생각처럼/ 황목련의 향기도 사라집니다/ 오, 나의 사랑, 그리운 이여!/ 나이팅게일의 슬픈 노래가/ 제 가슴에 안겨 사라지듯이/ 당신 품에 안겨서 나 죽고 싶습니다//

오, 이 풀밭에서 날 일으켜 주오!/ 그리워 죽습니다! 쓰러집니다. 기절합니다/ 나의 눈과 입술에서 당신의 사랑을/ 키스의 비로 퍼부어 주오/ 아! 내 빰은 차고 파리합니다/ 오! 당신 품에 이 가슴을 껴안아 주오/ 그러면 마침내 터지리니····//

스무 살은 담담할 줄 모른다. 셀리의 인디언 세레나데를 다시 읽으면서 지금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는 그대로인데 사람이 다르다. 사람은 같은 사람이래도 푸르른 잎이었던 그가 있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하는 그가 있다. 그러는 사이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는 이야기가 8월의 크리스마스다. 그리고 손에 남은 것이 담담함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또 손짓을 한다. 사진과 편지를 흔든다. 너,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잖아. 모든 이미지가 죽음으로 향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서 먹먹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때와 닮은 지금이었다. 눈물이 나지 않는 슬픈 영화, 꼭 8월에 내렸을 것 같은 흰 눈이었다. 담담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역시 정원이 남긴 편지로 맺는 것이 좋겠다.

-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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