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처럼 Jul 15. 2024

중경삼림 重慶森林

영화가 끝날 때 더


잠시 그쳤을 뿐, 장맛비는 활주로를 전개시키고 어디든 마음 가는 대로 쏘다니다 이 땅에 내릴 작정인 듯하다. 나를 둘러싼 대부분의 공기는 실의에 빠졌다. 젖은 것들이 산처럼 쌓였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들이 전선을 지키고 있다. 불쌍한 젊음, 장마철에는 모든 것에 곰팡이꽃이 핀다. 언제 또 한바탕 퍼부을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멀리 천둥이 울린다. 피 대신 물이 흥건하다. 피보다 걸쭉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소리가 소거된 현장을 나는 홍콩이라고 부른다. 94년 그때 우리는 서로 많이 좋아했었다. 홍콩에 가보고 싶었다. '싶었다'라는 말을 걸어 둔 방에는 햇살이 들까. 하루가 다 물에 잠겨서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슬리퍼가 동동 떠다닌다. 잃어본 적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골랐다. 이 물기를 좀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영화가 차르르 굴러간다.

정작 쓰고 싶은 것은 쓸 수 없다. 담배를 물고 살아도 한 줄기 빛을 얻기가 쉽지 않다. 홍콩 영화에 나오는 왕조위는 담배를 자주 입에 문다. 그는 경찰이면서 볼펜을 가지고 다니고 선한 눈빛으로 나 같은 이를 경원시한다. 그의 주소, 그의 글씨, 그의 집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중경삼림은 한자로 써야 멋이 나는 영화다. 重慶森林, 습하고 더워서 연애라도 할 수 있을까 싶은 열대 숲을 닮은 도시. 그 도시 복판에서 누군가는 쫓고 누군가는 쫓긴다. 누군가는 잃고 누군가는 찾는다. 당연히 죽겠지. 죽은 이, 누군가 죽는 것이 빽빽한 곳의 생리다. 하지만 죽어야 할 사람이 따로 있던가. 늘 죽음은 조금씩 아쉬웠다. 임청하는 턱에 살이 붙었지만 어떻게 그녀를 몰라볼 수 있겠는가. 그녀는 마약을 운반하다가 일이 틀어진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이 그녀가 하는 동작이며 걸음, 도망마저 선하게 다가온다. 예쁜 것이 죄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오해와 오역은 습한 곳에 피어나는 곰팡이꽃이다.

가장 가까웠던 거리를 영화는 기록한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 가장 가까웠던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지 못하고 산다. 또는 멀어져 가는 것만 바라본다. 경찰 223번 금성무는 임청하와 엮이지 않기를 바란다. '피곤하니까 쉬자'는 말이 그와 그녀에게는 항상 '쉼표'처럼 찍혔다. 사랑은 점점 실색 失色 하는 일이니까, 그 둘은 세상 사람들하고 다른 '사랑'이기를 바라면서 '쉰다'. 자신의 색깔은 장맛비에 옅어져 가도 상대를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상대를 부정하는 일은 쉬워도 그럼으로써 공허해지고 말 것을 경계한다. 둘은 가까워져라. 일부러 주문을 넣었다. 처음보다 영화가 끝날 때 더.

94년 4월 1일 만우절은 금요일이었고 한 달 뒤 5월 1일, 경찰 223번이 임청하를 사랑하게 된 날은 일요일이었다. 여기서 홍콩은 비행기로 3시간 반 걸리고 시간은 한 시간 늦는다. 94년 5월 1일 일요일에 휴전선 너머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3달 있으면 제대를 하고 그보다 한 달 전에는 김일성이 죽는다. 내 시계는 그날도 심심하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임청하의 구두를 벗겨주고 그 구두를 자신의 넥타이로 닦아놓고 방을 나서는 금성무에게 싱그러움을 하나 건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나는 연애만 알았지 연애하는 사람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었다는 것을 늦게 깨닫고 만다. 중경삼림을 어쩌자고 외면했던가. 하지만 그 노래가 들렸다.

95년 7월은 수영을 자주 했다. 산타모니카부터 캘리포니아 1번 해안 도로를 타고 가능한 멀리 가볼 생각이었다. 한국 사람이라고 그러면 백화점 이야기가 자동으로 화제가 됐다.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은 다리 이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이름을 댔다. 삼풍 백화점, 성수 대교. 한글 발음을 똑바로 가르쳐줬다. 삼풍, 성수! 그 시절 우리나라가 Chungking Express* 같았다. 붐비고 빠르고 무겁고 후덥지근한데 사람들은 슬펐다. California Dreamin' 그 노래를 다시 듣는데 95년 여름이 생각났다. 젊기만 했지 정작 젊음을 몰랐던 내가 다른 사람들의 연애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렇게 겁내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을. 나를 기만한 것은 나 자신인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왕페이처럼 순수하지 못했다. 첫눈에 반하고 약속을 지키고 그러고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을 할 줄 몰랐다. 이도 저도 아닌 내가 될 줄 몰랐다. 영화도 아니면서 영화 속 대사를 읊조리며 살 줄은 더 몰랐다.

"그날 오후 꿈을 꾸었다. 그의 집을 방문하는 ······.

난 깨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꿈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

더 이상 편지를 주고받거나 삐삐로 연락을 하는 연인은 없다. 빗물에 번진 글자를 알아보기 위하여 편지를 말리는 일은 없다. 기다리는 일이 없어졌다. 기다리는 일이 없어지면서 어떤 것은 상승하고 어떤 것들은 폭락한다. 나는 두 가지 일을 잘한다. 길을 찾는 일, 기다리는 일. 하나는 내비게이션이 차지했고 다른 하나는 어느 날 증발해 버렸다. 이제야 엉킨 것이 풀린다. 장마가 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탓이다. 말이 서툴면 글이라도 쓸 줄 알았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삐뚤빼뚤했던 탓이다.


지금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기.

사랑, 그 엄청나게 흐린 날

거리 가득 눈 퍼부은 저녁

차車들이 어둡게 막혀 있는 거리

갇힌 택시 양편에 죽마竹馬 붙이고

세차게 뛰는 엔진 감싸안고

양옆구리에 단 죽마 짚고

겅중겅중 뛰어가기.

앞이 막히면 죄우로 뛰기.

그대 팔을 들면

사랑, 그 조그만 서랍들을 모두 열고

엉켰던 핏줄 새로 빨며

흐린 구름 뚫고

함께 떠오르기.

눌렀던 춤이 튀어나온다.

지금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기.

- 황동규, 사랑의 뿌리 중에서.


1978년에 세상에 나온 시 詩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다시 95년 크랜베리스가 들리는 서울 거리, 그때는 왜 거리에서 음악이 다 들리고 그랬었던가. Dreams. 크랜베리스의 그녀, 돌로레스가 부르는 환상이 나를 부른다. 돌아가고 싶은 거리에는 항상 그 사람이 있다. 젊은 그 사람이 있다.

이전 05화 굿윌헌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