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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8시간전

가버나움

부모를 고소하겠습니다


1%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마저도 없다면? 한순간이라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생각했다. 꽉 막힌 곳에 갇혀서 발버둥 치다 온전히 체념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1%의 희망이라는 말이야말로 순도 100에 가까운 희망이었구나. 내 희망은 불순물이 섞여 만들기 쉬운 것들뿐, 그래서 비싸지도 않았다. 희망이 깨끗하지 못했다. 투명하고 순수한 희망을 바라보는 일은 그렇게 '없는' 희망을 바라보는 일이라 전혀 희망적이지 못하다. 희망적이지 못한 것을 희망하는 1%가 세상에는 있다. 불순한 내 희망이 순전한 저 희망을 안타까워한다. 참 나쁘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포기하신 땅이 갈릴리 호숫가 마을 '가버나움'이다. '소돔 땅이 마지막 심판 날에는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마태 11, 23'

하늘 높은 데에서 레바논의 빈민촌을 내려다보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높은 데에서 보면 움직이는 것들이 잘 보인다. 산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들 사는 것이 통으로 눈에 들어온다. 다들 움직이고 있다. 희망의 순도를 낮추고 있다. 거기 '희망 없음'이 없다. 가난한 구석에서도 불순한 희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아직 기회는 있다. 오리지널 '희망', 희망의 맨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그만 눈을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라, 당신의 오늘은 그저 평온하게 지날 수 있다. 평온이란 말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제대로 희망이 없는 땅을 둘러본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비용이 든다. 얼마가 들지 알 수 없어서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때는 언제든 그만 밖으로 나와라. 밝은 데로 나오기 바란다.

당신 자신을 가버나움에 사는 다른 누구와 맞바꾸어 상상하는 일을 만들지 않기를 또한 바란다. 실감하지 않기를.

그러나 당신은 영화와 동행하고 말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게, 혹은 자연스럽게 거기 스며들고 말 것이다.

Helplessness.

영어 단어 Help는 뜻밖의 뜻을 가진 말이다. 도움이나 도움이 되는 것, 또는 돕다, 살려달라는 Help me의 헬프!

Help는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Help 가 없으면 'There is no Help for it, 어쩔 수 없어요.'가 된다.

도움을 줄 수도, 도움받을 수도 없을 때 우리는 무기력해진다. 그것이 Help 없는, Helpless 상태다. 가장 근원적인 도움은 먹을 것이다. 먹어야 힘이 나고 살 수 있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이 Helpless다. 희망도 결국 그 마음을 먹여 살리지 않던가. 너 자신을 '먹여' 살리라는 말이 Help yourself다. Help는 먹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 희망의 냄새도 나지 않고 망망하기만 해서 잠만 자야 하는 곳에서 12살 정도 된 소년 '자인'은 출생기록도 없이 산다. '산다'라는 말이 잘못 집어넣은 팔이나 다리같이 허공에서 가난했다. 제대로 된 희망은 먹을 것도 옷도 없다. 자인이 입고 있는 흰 줄이 두 개 들어간 추리닝은 어쩌면 그렇게 희망으로 보일까. 저 날 것 그대로의 표정은 연기일까, 삶이었을까. 자인은 옷 같은 것에 몸을 끼워 넣고 덜렁덜렁 살아갈 뿐이다.

그의 부모는 무기력하게 호소한다. 나도 부모 잘 만났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며 법정에서 눈물 흘린다. 이해는 가지만 그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단 하나다. 무기력했으면서도 살려고 했던 것! 살려고 했다면 다른 쪽 길을 걸었어야 했다. 딸을 팔아버린 시점에서 그들의 무기력은 더 이상 사람이 도울 수 있는 그것에 머무르지 못한다. 어린 자인을 그들과 같은 무기력한 인생으로 끌고 들어가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한탄한다. 다시 Help의 등장이다. Help가 다 사라지기 전에, 순도 100에 가까운 희망이었을 때 덜 슬퍼하고 덜 체념하고 덜 아파해야 한다. 무슨 수로 그럴 수 있었겠냐고 소리치는 듯했다. 너도 나에게 돌을 던지겠냐고 뻔히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희망할 것은 무엇인가. 희망을 잃으면 가망이 없다.

Hopeless, 무기력은 1%의 희망도 다 떨어졌을 때 찾아온다. Helpless.

서로 알게 된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책임이 생긴다는 말을 했던 지난날의 내가 슬그머니 외면했다. 성모상 앞에서도, 슬픈 피에타 상 앞에서도 손 모으고 '자비를, 자비를' 되뇌었던 감각에 마비가 왔다. 여동생 사하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칼을 들고 뛰쳐나가는 꼬마 아이 자인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감독의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본다. 어떤 삶이 그녀를 가르쳤는지 알고 싶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짓밟으면 분노가 일어난다. 밟으면 꿈틀거리고 꿈틀거리다가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면 희망이 생겨난다. 하지만 가난은 가난을 잘 알기 때문에 가난이 가난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힘없는 사람이 더 힘없는 사람을 몰아대면 나중에는 젖먹이 '요나스'가 팔려가야만 한다. 밑바닥이 밑바닥을 훑어버리면 상처가 낫지 않는다. 비극은 거기 도사리고 있다.

어른이 무기력하면 아이들이 죄를 짓는다. 아이들이 죄를 짓는 세상이 지옥이다. 지옥에서는 팔이 길어서 서로 먹여줘야 살 수 있다고 그런다. 자기만 먹으려고 덤벼들다가 다 굶어 죽는 곳이 지옥이다. 무기력이 무기력을 외면하는 세상이 지옥이다. 그게 무기력이다. 무기력한 것은 죄 중에 가장 아픈 죄다. 그러니 그러지 말아야 한다.

'부모를 고소하겠습니다.'

어린 자인이 법정에 세운 것이 과연 그의 무기력한 부모였을까. 수많은 아이들이 지옥 같은 길거리를 오늘도 헤매고 다닐 텐데 당신의 무기력이야말로 참담하다고 영화는 고발한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숫가 어느 마을이 아니라 거기, 당신이 늘 다니는 곳 아니냐고 똑똑히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자인, 그 눈빛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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