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어제 친구가 집에 찾아왔다. 부산에 사는 친구인데 청주 장례식장에 참석했다가 하룻밤 묵고 정읍 어머니, 아버지 뵈러 가는 길에 익산에 들른 것이다. 친구는 거울 같은 것이어서 그 모습을 보며 내 모습도 짐작하게 된다. 나도 저와 비슷하게 머리도 희끗하고 나이도 들어 보이겠구나.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이런저런 감정이 들기도 하면서 세월이 무상하다는 푸념도 섞여 나왔다. 하지만 친구란 무엇보다도 반가운 생각이 가장 위에 얹힌 팥빙수 같은 존재 아니겠는가.
나를 잘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질문 하나로 구분이 된다.
'글 좀 쓰냐?'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이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내도 '글' 이야기는 한 토막도 꺼내놓은 적 없는 사이도 개중에는 많다.
'글을 쓴다'라는 것은 내밀한 어떤 것이다. 혼자서 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이쪽과 저쪽을 오가면서 시간을 부지런히 쓰고用 또 쓰는書 작업은 오롯이 혼자만의 작업이다. 그렇게 찾아낸 말들을 엮어서 주렁주렁 매다는 재미가 좋다. 결국 자기 속에 머물던 것들을 밖으로 꺼내는 것인데 어떤 것들이 따라 나올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 제 기능을 잃은 장기를 떼어야 할 때도 있고, 곧 썩어버릴 상태에 있는 종양이라면 운이 좋은 거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거라서 얼마나 좋은 일이냐. 우울憂鬱에 빠진 사람에게도 써야 할 이야기가 감춰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늘진 숲에 빛이 통과하는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환해지는데 제 안에 빛을 비추는 사람은 또 얼마나 좋겠는가.
볕에 바삭 말리거나 때론 풍우風雨에 일부러 내놓고 철철 비를 맞혀가며 나도 모르는 신세계를 몰래 꿈꿔보는 일. 생각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상상력인지 모를 것들이 서로 엮이면 이런 식으로 세상을 구경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쓴 글이 '나그네'가 되어 세상을 두루 돌아다닐 꿈을 꾼다. 내밀하고 미약하였던 작업이 창대할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야말로 비할 바가 없는 열락悅樂이다. 인사 대신 물어오는 말에 나는 나를 확인한다.
'글은 좀 쓰냐?'
Ⅱ
오전 5시 32분. 어떤 사람은 벌써 일어나서 움직이고 있을 테고 대부분은 아직 잠자리에 있을 시간이다. 요즘 좀 피곤했던 탓에 한 시간 정도 늦은 편이다. 이 시간을 가장 잘 보내고 싶어졌다. 예전에 - 몸이 건강하고 일에 바쁘고 사람 만나는 재미에 빠졌었던 때 -는 새벽에 눈이 떠지는 일조차 없었다. 하긴 매일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12시는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리기 일쑤였으니 나에게 새벽이란 말은 인연이 없었다고 해야겠다.
몸이 아프고 - 몸이 아프다는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나서 어쩔 수 없이 내 생활이란 것은 변화를 맞았다. 그 변화는 모든 것의 축소였다. 먹는 것과 움직이는 것, 생활이란 것을 가장 크게 구분하자면 먹고, 자고, 움직이는 것 아니겠는가. 1/3 수준으로 모든 것을 줄이되 부족한 부분은 반복하면서 보충해야만 했다. 그러고서도 처음 6개월은 실로 엄청난 경험을 했었다. 내가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사람이 말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필요한지 몸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고 한 번도 불편해 본 적 없었던 일들이 모두 '힘'이 들었다. 그게 아프다는 것이다.
삶이 한편으로 몰인정하다는 것은 사정을 봐주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프니까 좀 쉬어'라는 말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인 듯하다. 삶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냉정한 얼굴도 하고 있어서 항상 그 앞에 겸손할 것을 잊기 전에 적어둔다. 아픈 사람들이 겉으로도 문제가 많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각해지는 것은 그 내부의 사정이다. 자꾸 안쪽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안쪽이 흔들린다는 것은 갈등이 심해지고 병은 깊어져만 간다는 것이다. 마침내 스스로 예전의 자신을 잃고 완전 딴 사람이 되어 자리에 누워있게 된다면 그는 희망을 잃은 것이다. 삶은 브레이크 없이 한순간 나를 낭떠러지로 몰아세우는 거친 바람일 수도 있다. 그러니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 '몸' 따라 '마음'가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
나의 저항과 치유는 창구窓口 하나로 통일시켰다. 자꾸 불안해지려는 내 삶에 대한 저항과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몸뚱어리를 위해 나섰다. 노트북 컴퓨터에 불이 들어오고 텅 빈 공간이 펼쳐지면 나도 그와 같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백지 같은 곳에서 첫 줄을 적어나갈 때, 나는 점에서 선으로, 선들이 모여 형체를 이루는 그림이 되어간다. 내가 그린 그림 속에서 새벽 첫 새 울음소리도 듣다가 오래된 연인의 마음을 헤아려도 보는 아량雅量을 품기도 한다. 변화가 찾아오더라도 급격하고 불안정한 변화가 아니라 차분하고 따듯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글쓰기'는 그대에게 어쩌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깨달았고 새벽을 깨어서 맞이하기 시작했다. 새벽을 맞고 싶은 자는 밤을 헛되이 보낼 수가 없다. 밤은 쉼으로 거룩해진다. 쉼이어야 한다. 숨을 가지런하게 가꾸는 쉼, 밤은 그래야 한다. 주고받는 '셈'이 명확한 것이 삶인 것을, 나의 밤을 나에게서 쉬게 해주고 싶었다. 나를 떠나도 좋다고 허락했다. 제대로 놓아주고 싶은 날들이 생겼다.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침 네 시에 일어나 5시간 글을 쓰면서 쓸 이야기가 없어도 원고지 20매를 꼭 채운다고 그런다. 더 쓰고 싶어도 20매가 완성되면 아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픈 몸이 답답해서 환기라도 시켜줄 요량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 꿈꾸었던 소설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다고 여겼다. 소설은 나에게 너무 많은 '준비'를 시킨다.
준비만 하다가 이렇게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는데 또 준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대로 된 준비는 머릿속에 담아 놓는 수많은 '구상'이 아니라 내 손가락 끝에서 실제로 쏟아져 나오는 '글'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시간을 앉아서 뭔가를 떠올린다는 작업의 수고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 보람이란 말을 손에 쥐고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수고로움이란 말은 이제 멈출 수 없는 희망가의 한 소절이 되었다.
가락이 어깨에 붙으면 날개보다 더 쓸모 있다. 어울리는 곡조曲調를 흥얼거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냉정했던 삶에게도 한 수 가르쳐 주게 된다 생각하니 설렌다.
우연히 찾아낸 보물을 잘 닦아내고 싶은 마음이다. 심심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닦고 있는 것이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것이라면 정성을 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맡겨진다는 것을 감동으로 새기면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당신도 나와 같이 쓸 것이다.
2018년 7월 18, 9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