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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30. 2024

이 요셉피나 수녀님

여기 좋으시죠?


송학동 성당 마당에 들어선 것이 근 1년 만이다. 작년 이맘때 허리가 불편해지면서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잠시 쉬었다 나가겠다는 말만 전하고 다른 일체의 동작이 없었다. 그리고 사계절이 지났다.

어제 오전 9시 20분에 성당에 차를 세우고 요셉피나 수녀님을 기다렸다. 비가 온 뒤라 하늘은 흐렸고 바람이 더 불었다. 날이 춥지 않은 것이 그나마 사람을 도왔다. 환자용 목발을 짚고 수녀님이 나오셨다. 뜻밖에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며칠 전에 바로 그 자리에서 뵌 듯한 인상과 느낌이었다. 어색한 것도 특별히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까닭을 알겠다. 평소에 주고받는 글 때문이었다. 글은 생각보다 사람을 튼튼하게 잇는다. 글이 지나는 관, 그 통로에 흐르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우리가 어린 시절 배웠듯이 식물은 그 푸른 잎으로 햇볕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한다. 그 과정에서 만든 영양분을 줄기와 뿌리까지 보내는 일, 그때 지나가는 길이 체관이다. 수녀님과 내가 주고받았던 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글은 과연 그만한 영양을 머금고 있었을까.

수녀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글을 썼냐고 물으셨다. 7년이 지났고 5년 동안 아침 묵상을 전했고 이제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냐며 금방 되물으셨다. 나는 이럴 때 색다르게 대답하는 구석이 있다.

'내가 특별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요.'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면서요.'

어떤 면에서 특별한?

수녀님은 외국 생활을 하셨던 분이 틀림없다. 이렇게 내 다음 말이 나오기 전에 방금 내가 했던 말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이면서 흐름을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는 신선한 매너가 있다. 우리 식의 대화법에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 맛. 그것은 계핏가루 같아서 은근한 향이 좋고 특히 인지력 저하를 막아주는 효능이 있다. 나는 계피를 아껴서 먹는 편이다.

독일에서 생활하셨던 것을 알고 있었는데 - 내가 가끔 일본 말이 섞여서 나오는 것처럼 독일어가 수녀님에게서 하나씩 떨어지는 것이 재미있다. - 어제는 이스라엘에서 봉사하셨던 시절도 대화 중에 살짝 등장했다. 그때 예감이 있었다고 한다. 무릎 때문에 고생할 것 같다는.

'애정이 느껴지는?'

더 물어보면 대답이 궁색해질 텐데, 거기서 다른 데로 흘러들었다.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방해되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마침 금강이 옆에서 흐르는 곰개 나루에서 바람 속을 거닐던 참이었다. 수녀님 고향은 어딜까? 추풍령 근처에서 금강을 처음 보고 감탄했다며 옛날 기억을 떠올리더니 이게 바로 그 금강이었군요! 연발로 즐거워하셨다. 비 온 뒤라 물이 깨끗하지 못했지만 품이 넓고 결이 깊은 강물이 회색 하늘에 어울렸다. 저 건너편이 충청도가 되고요, 바로 저기가 그 유명한 한산입니다. 한산 모시 할 때, 그 한산이 저기입니다.

수녀님은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면서 우리가 그럼, 북쪽으로 왔겠다며 나를 바라봤다. 그렇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북서쪽으로 10시 방향으로 왔습니다. 입이 달싹거렸다. 테이블 앞에 앉은 사람이 여기 맛있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를 알게 됐는지 여기는 언제 어떤 메뉴가 맛있는지 다 알려주고 싶어지는 것처럼 땅을 흥미로워하는 사람한테는 땅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진다. 부동산 말고 땅, 그 땅 아니라 이런 돈 안 되는 이야기 말이다.

'이골이 난다는 말 아시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수녀님이 금강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시원한 표정을 짓는 동안 나 혼자, 만들어본 장면을 다시 옮기는 것이다. 이 글이 수녀님께 보내지면 그제야 수녀님도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은 저기 모시 마을에서 들어야 절대 안 잊히는데요. 골짜기 그러면 어떻게 생긴지 아시죠? 산과 산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이 골짜기잖아요. 그러면서 나는 내 손등을 앞에 내 보인다. 이렇게 맨들맨들한 데가 살짝 패인 것이 '골'이거든요. 다른 손으로는 연신 홈을 그렸다. 작게 밑이 둥글게 파인 것을 시늉하면서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린다. 여자들이 모시 작업을 하는데 모시를 이빨로 그렇게 골라냈다고 그래요. 그런데 얼마나 오래 했으면 이빨에 골이 나는 거죠. 이빨에 골이 날 때쯤이면 아주 솜씨가 능숙해지는 거고요. 이에 골이 나야 뭔가를 하나 제대로 해내는 처지가 된다는 것이죠.

나는 그 말을 잊은 것은 아니다. 강 건너 한산을 바라보면서 얼마든지 재미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녀님이 대림 시기 - 대림(待臨)은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로 준비하는 성탄절 전 4주간 -처럼 바쁜 시기에 일부러 나를 보자고 한 것을 잘 알면서 딴청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가만히 금강을 바라보는 일이 그 순간에 할 일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따로 안식년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나는 성당에 다니지만 수녀님들이 어떤 체계로 자리를 옮기고 어떤 방식으로 수녀가 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수고하는 사람들이 수녀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분들의 이름도 나이도 다른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물이나 공기처럼 꼭 필요하지만 언제나 마실 수 있는 것은 존재감이 없다. 노자의 덕이었던 듯하다. 없는 듯 있을 것, 하지만 필요할 것. 나는 동경만 하고 꿈에서나 만져보는 無爲의 爲. 그런 동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거울에 서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곰곰해지지 않을 수 없다. 11시 반까지 성당으로 돌아올 생각으로 출발했던 길이다. 그래서 정읍에 가서 따뜻한 대추차를 마시는 것도 지우고 미륵산 둘레길을 걷다가 순두부를 먹는 것도 생각하다 말았다. 그나마 가까운 곳이 여기였다.

'수녀님, 여기 좋으시죠?'

'네, 금강이 이렇게 근사한 줄 몰랐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조금만 더 가시지요, 수녀님 보시면 좋아하실 것 같은 곳이 저쪽 강 건너편에 있거든요.'

'대신 시간이 좀 늦어질 수 있는데, 괜찮으세요?'

웅포대교를 건너 성흥산성까지 올라오는 데 차로 20분 정도 걸렸다. 도중에 수녀님은 카라멜 마끼아또, 나는 카페라테를 한 잔씩 주문해서 챙겼다. 공기가 상쾌했다. 높지 않은 곳이지만 그래도 산 위라서 멀리까지 보이는 곳이다. 계단 앞에서 수녀님이 각오를 하고 걸음을 떼었다. 평지는 그런대로 걸을 만한데 계단은 영 힘드시다며, 절반쯤 당황하고 절반쯤 기대에 찬 표정이셨다. 벌써 아래에서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보고 한차례 감동이셨다. 이 분은 감동의 폭이 넓구나. 그래서 성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누군가는 시인이 되고 누군가는 음악가가 되는 그 마법의 샘물 말이다. 뮌헨에서 로마까지 기차를 타고 오면서 봤던 풍경이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차에서 했던 이야기가 거기까지 우리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똑같이 그렇게 가보고 싶다, 물론 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만, 속으로만.

산티아고를 가보고 싶거든요. 어머? 나도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3개월 시간이 남아서 그 길을 시도해 볼까 했다고. 결국 다들 말려서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예 발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고. 수녀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 하나를 또 속으로 삼켰다. 산티아고 가려고 돈도 모았었는데, 그거 저번에 딴 데 썼어요. 자꾸 꼬마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계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3천 미터급에도 올랐다고 그러셨는데, 거기는 어디였을까?

'세상에, 세상에.'

수녀님은 왜 성당에 나오지 않느냐는 말을 거의 꺼내지 못하셨다. 성흥산성 느티나무를 보고 10분은 족히 말이 없으셨다. 분위기를 기억하는 방법은 음악이라며 내가 어제 아침 눈 뜨고서부터 계속 듣던 음악을 다시 켰다. 제목은 일부러 알려드리지 않겠다고 하고서 관심을 끌어올렸다. 한껏 높고 한껏 고즈넉한 공기 속에서 빈 가지가 하늘을 덮은 나무에 기대어 바람을 피했다. 그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나도 처음이었다. 실컷 그림 같았다.

'수녀님, 이제 가셔야 해요. 지금 출발해도 늦을 거 같아요.'

'내가 여기를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어서, 잠깐만요. 사진 좀 찍을게요.'

욕심이 생기더라고, 아까 차 안에서 어떤 이야기 중에 욕심이 생기더라고 그랬었는데, 그 대목이 뭐였던가 골똘해졌다. 그래, 산티아고가 수녀님한테는 그런 욕심에 드는 거였구나. 나는 그것을 욕심이라고 전혀 의식하지 않는데, 정말 말 그대로 어떤 사람은 욕심을 부리고 어떤 사람은 욕심을 버리는구나. 모든 순간에 그 두 선택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를 나눴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미사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사는 게 이유라면 이유가 될 것이다. 살아가니까 성당에 나가고 살아가니까 성당에 나가지 않고, 나는 내 사는 이야기를 편하게 들려줬던 것 같다. 어디 가서 잘 하지 않는 이야기, 잘 못하는 이야기를 단순히 수녀님이라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려고 하는 것보다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 더 커 보였다고 할까.

내가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부분, 애정이 느껴지는?에서 끝났던 그다음은 아마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 맞을 것이다.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요.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어쩐지 편들고 싶고 기도라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들을 아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특별한 거 같아요. 붕어빵을 사들고 오는 가장을 기다리느라 잠을 쫓는 아이들한테 붕어빵을 내미는 일은 말이 필요 없잖아요. 말이 필요 없는 글을 쓸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거라는 것은 누구나 알거든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수녀님이 그러셨다.

대림 잘 지내고 기쁜 성탄을 맞이하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다음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소리가 아닌 바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수녀님은 고개를 숙여 웃으셨다.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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