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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23. 2024

수취인 不記

 안녕한지...


완연했다. 봄기운이 완연했다.

완연하다는 말은 꼭 한 번 그러면서 딱 한 번 피어나는 봄꽃 같아서 매화가 한창일 무렵에 잊지 않고 꺼내 본다. 그 말을 손바닥에 놓고 오래 바라본다. 올해도 이렇게 보는구나, 반가움이 눈에서부터 사르르 돈다. 어느 해는 소년 같고 어느 해는 소녀 같았던 그 말이 올해는 아가씨 같고 청년 같다. 사물이 어려 보이는 나이, 나는 그 나이에 닿고 있구나.

지금부터는 따뜻해지기로 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들고 외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고 내 손바닥 위에 앉은 그 말도 우리를 둘러싼 다른 것들도 하늘로 피어오를 것처럼 간지럽다. 훈훈하고 어딘가에서 꽃내가 풍길 것만 같다. 말이 가져다주는 마음인지, 마음 따라 생겨나는 가락인지, 그 공간에는 짧아서 좋은 댓글을 달아놓고 싶다. 이렇게 - 봄은 마림바다. 털실로 된 말렛*을 한 손에 두 개씩 들고 춤추듯이 연주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순간을 연주하는 것 같다. 소리도 색도 옷을 갈아입는, 봄!

눈에 보이는 것처럼 뚜렷하다. 나도 그랬으면 싶다. 한 번 그래 보고 싶다. 수선화가 선명하게 줄지어 피었다. 꽃 속에 꽃 -저것을 부관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을 들여다보다 즐거워하는 나를 발견한다. 수선화의 부관은 사람 마음 같은 거, 본모습 같은 거라며 하나하나 더 신중해진다. 봄에는 1분씩 느리게 가는 시계를 차고 그렇게 다른 때 못 본 것들을 챙겨 보기로 한다. 서툴더라도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물가에 앉아서 철썩이며 부딪히는 잔물결을 하나씩 세어본다.

편안하다는 것이 때로는 달콤한 맛이 난다. 주름이 펴지고 기지개가 난다. 편안함 속에 있으면 마음이 순해진다. 호숫가를 편안하게 거닐었다. 완연과 편안, 두 친구를 양 옆에 두고 팔을 흔들며 홀가분하게 걸었다. 이렇게 걸으니까 좋다, 좋다, 좋다.

수선화 다음에는 봄이 축제를 여는 곳마다 튤립이 피어나겠지. 왕관 같은 꽃 그러면서도 수줍은 듯 움츠린 것이 마음이 간다. 보라색 붓꽃도 여기에서 봤던 것 같은데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땅속에 박힌 전구알처럼 둥그런 뿌리들, 그 뿌리가 밝히는 불빛이 봄을 빛낸다. 완연하다는 말은 '밝은 빛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이란 뜻을 담고 있어서 정감 있다. 바야흐로 봄이다.

지난겨울, 궂은비가 내리던 날에 멈췄던 내 걸음도 거기 있었다. 서둘러 돌아오느라 챙기지 못했던 걸음을 먼저 알아봤다. 봄이 되면 올 줄 알았단다. 다른 데 갈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눈이 몇 번 더 내리는 것을 구경하며 지냈다고 그런다. 글쎄, 너도 자라는구나. 세상에 나온 것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갈 줄 아는 것이 신기하다. 너도 가끔은 그리운 것이 있고 기도를 하고 싶고 그러는지, 나처럼 말 붙여 주는 존재는 언제나 그립다고 그러는 것이 또 사람을 감동시킨다. 발자국, 걸음은 어떤 기도를 할까. 여기에서도 새벽이면 종소리가 들리고 그랬는지, 달빛을 받으며 낮게 날던 청둥오리들은 무슨 이야기를 속삭이던지, 내가 모르는 세상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걸음아, 잘 살아라. 튼튼하고 용기 있게, 마치 트로피를 높이 들어 올리는 선수처럼 모든 계절을 이겨내라. 우리 또 어느 길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 등을 맞대고 키도 재고 팔씨름도 겨뤄보자. 나는 보기에도 멋진 케이크를 들고서 너를 찾아가, 웃고 떠들면서 밤을 다 지새우고 일어나는 꿈을 꾼다. 반가움이 가득했던 자리에 무엇을 놓고 오면 좋을까. 하루에 한 번씩 너를 웃게 해 줄 그것은 무엇이면 좋을까. 백합 구근을 거기에 심어놓으면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계단이 제법 다채로울 것 같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며 너는 나를 몇 번쯤 떠올릴까.

기억은 불같은 거라서 타올랐다가 사그라진다. 내 기억들은 어떤 모양으로 타올랐던가. 그것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이글이글 영글었던가. 애타게 불러대는 손짓인 양 활활 솟았던가. 내가 기억하는 봄날은 잘 지내고 있는지, 그때 찍었던 사진 속에서 내가 지었던 웃음은 또 어떻게 지내는지, 너는 안녕한지·····.

지난해, 지난날, 지난 시간, 들여다보면 아득해지는 그 거울 속 흔적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다. 봄날이어서, 봄이라서 편안하고 완연했다. 모든 것이 구름 같았고 밥 같았고 음악 같았다. 봄이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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