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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선생님

11월은 친하다

by 강물처럼 Nov 3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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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눈을 붙이던 중에 메시지를 받았다. 부안 선생님의 모친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잠결이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런 날이었던지 오늘밖에 조문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대비를 하느라 문제를 푸는 중이라서 마지막 타임을 앞 타임과 붙였다. 그리고 8시 반에 부안으로 향했다. 비가 내렸고 길은 어두웠다. 그렇지 않아도 안경을 맞추려고 안과에도 다녀왔는데 여차저차 미루고 있던 참이라 밤길 운전이 걱정이 됐다. 70km로 달리다가 차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속도를 더 늦춰가며 도착했다. 그러니까 내가 날짜를 잘못 알았던 것이다. 한산한 장례식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오늘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부안 선생님을 뵀다. 어떤 이야기든지 곧장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얼굴이 희미하게 반겼다. 빗속에 어떻게 왔느냐는 말도, 얼마나 상심이 크냐는 말도 다 보따리 하나에 싸놨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만 들고 가면 될 것 같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많이 우셨겠는데요? 많이 울어서 눈이 아프다고 그랬다.

한가한 장례식장이었지만 어느 장례식장에서 인사를 건넸던 것보다 더 많이 인사를 나눴다. 허리가 좋지 않아서 고개를 다 못 숙인다고 어설프게 웃었고 2할은 어색해했다. 교회 목사님도 '강 선생님이시군요' 그러면서 내 앞에 앉으셨다. 군대에서 장교로 있다가 퇴역했다던 선생님의 형님께서도 이야기 많이 들었다며 스스럼없이 옆에 앉으셨다.

"맨날, 강 선생님 강 선생님 그래서, 강 씨가 뭐 얼마나 좋다고 그랬싸, 그랬는데 이렇게 뵙네요."

그 말이 편안했다. 강 씨가 뭐 얼마나 좋다고····. 나도 동감하는 말이 스르르 샤워기에서 쏟아졌다. 물에 젖어야 깨끗해지고 따뜻해지는 시간, 20분짜리 샤워가 좋다. 사모님도, 아들도 딸도 엉겁결에 인사를 나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뵈러 왔다가 뜻밖에 바빠지고 말았다.

30분쯤 앉아 있다가 장례식장을 나왔다. 선생님 딸이 다른 식구들에게 하던 말이 등 뒤로 들렸다. '아빠, 제일 친한 분이셔.'

차 없는 도로를 밤에 달려서 돌아왔다. 잠시 바람을 쐬러 드라이브를 나온 듯했다. 병실에서 만난 인연이다. 나이도 나보다 위라는 것만 알지, 정확히 모른다. 바래봉에 철쭉이 막 절정을 지났을 무렵, 지리산 봉우리들을 보며 이런 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월출산에 가서는 이런 데를 데리고 와줘서 고맙다고 아이처럼 좋아했던 분이다. 젊어서 전기 사고를 당했고 사는 일은 늘 건강하지 못한 몸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숙제가 됐다. 유달산 아래 자그마한 카페에서도 즐거웠다. 격포 바닷가에 찾아가는 길이 이제는 심심하지 않다. 거기 가는 길에 선생님 동네가 보이니까. 언제든 '가시죠' 그러면 되니까.

'친하다'는 말이 생소했고 신선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친절했던 딸은 알고 있을까. 어딘가를 누군가와 동행하면서 내 등에 진 것을 한 번도 뺏겨본 적 없다. 그날 선생님이 내 짐을 지고 길을 다 걸으셨다. 욕심만 많아서 산에 소설책을 끼워 넣고 가는 나 때문에 선생님이 더 고생하셨다. 처음으로 짐을 맡겨놓고 홀가분했고 미안해하지 않았던 날이다.

어젯밤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내 11월은 나와 친한 것 같다. 적어도 우리는 서로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아는 것 같다.

오늘 아침은 맑다. 아침 하늘을 열어놓고 고인의 가시는 길을 배웅한다.


평안하소서.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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