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념이 많은 건 언제나 괴롭다. 이따금 억누를 수 없는 공포와 슬픔이 찾아와 몸서리치는 것도 그런 탓이다. 일부는 욕망에서, 일부는 후회에서, 그리고 그것들은 사소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상념으로부터 비롯된다. 언제나 호기심은 탄생과 상실, 소멸에서 피어올랐다.
어렸을 적부터 종종 두려웠다. 주변에 넘쳐흐르는 삶의 탄생과 죽음, 그 누구도 선택한 적 없고 택할 수도 없는 피투성에 대해 생각하면 공허해졌고 심장이 찌그러지는 듯 폐부가 답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짧고 작은 삶에 집중하자고 생각했지만, 임종의 순간까지도 번식에 대한 욕망으로 배를 떨어대는 늦여름 매미처럼 그 호기심을 끄집어 엮는 사고의 욕망이란 내게 생식 같은 것이었다. 의식은 가느다란 끈으로 육신에 간신히 매달린 채 일상과 공허 사이를 떠돌았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두렵다. 물론 예외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진짜 두렵지 않을 수 있다. 시냅스의 물리적 손상, 혹은 실현된 초자아, 또는 사회문화학적 특이 케이스들을 제쳐두고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내 두려움의 뿌리가 타인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두려운 것은 욕구의 상실, 관계의 종말, 사고의 끝, 삶의 소멸이 아니라 인류의 상실, 생태계의 종말, 지구의 끝과 은하의 소멸이었다.
의미가 '어떤 것이 지닌 뜻이나 가치'라면 의미는 인지와 해석, 보존을 통해 유의미해진다. 반대로 말하면 유의미하지 않은 것은 인지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았으며 보존되지 않은 것이며, 이는 가장 부정확하고 불합리하고 흐릿하면서도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탄생과 이어진 죽음'의 여집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일 작은 단위로는 한 사람에서부터 한 공동체, 한 국가와 한 대륙, 더 나아가서는 인류와 은하까지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의미는 한 공동체에서 유의미하고, 한 공동체의 의미는 한 국가에서, 한 국가는 한 대륙을 거쳐 인류 속에 의미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류에게도, 은하에게도 수명이 있다. 명확히 그 순간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반드시 마주치게 되며 그 끝에는 무의미함만이 존재한다. 크기가 가늠되지 않으나 명확히 구분된 공간에 갇혀 전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무력감과 허무함, 거기까지 의식이 다다르면 명치 안쪽에서 쇠구슬 하나가 추락한 듯 덜컥거리고는 바닥 속으로 가라앉는다.
결국 의식은 가느다란 끈을 붙잡고 다시 육신으로 돌아와서는 실증적 가치들로부터, 제일 작은 단위에서부터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나의 글과 사진, 모든 기록들을 헤집다가 최종적으로는 위의 사고 과정과 결과로부터 도피하고 망각한다. 생각을 줄이고 작문을 멈추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잊고 지내다가도 불쑥 발작을 일으키듯 생각이 떠밀려오면 또 나는 급류에 휩쓸려서는 공포와 슬픔에 잠긴다.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짓이라고. 신경 쓸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는 정신병이라는 비평 혹은 비난, 이 글을 읽는 당신을 비롯하여 내게 향하는 비슷한 류의 의견들에 대해 반박의 여지가 없다. 사회적으로도, 자아적으로도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두려움이다. 실증적 존재들로부터 벗어난 초지구적 허무주의에서는 어떠한 발전적 가치도 찾아볼 수 없지만 애석하게도 사고가 멈추거나 의식을 잃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너무 노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의미 없는 사고에 휩싸여 무기력한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인류애를 추구하면서도 그 기반에는 지독한 니힐리즘에 빠져있는 표리부동함에 대하여, 일기장에 써도 부끄러울 상념들을 이렇게 배설한 것에 대하여, 긴 시간 읽어낸 이 글이 어떠한 발견과 해석과 재창조도 없이 마무리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나의 무의미한 주절거림이 유의미하길 바라는 마음에 인지와 해석, 보존을 핑계로 그 책임을 당신께 떠넘긴 것에 대하여,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