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작가 May 17. 2017

바스락

성숙한 소리


  어릴 때 붕어빵을 참 좋아했다. 겨울철 하굣길에 한두 개쯤 있는 포장마차를 지날 때면 꼭 주머니를 뒤적거려 모은 동전으로 붕어빵을 사 먹곤 했다. 그런데 붕어빵의 맛 자체도 좋아했지만, 붕어빵이 담긴 포장지의 느낌이 참 좋았다. 갈색빛의 구겨진 종이봉투를 손에 받아들면 특유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쏠렸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호떡이든 국화빵이든 종이봉투에 담긴 것들은 다 좋아했다. 

  바스락. 3음절의 이 의성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듣기만 해도 붕어빵이 가득 담긴 그 시절의 큼직한 봉투가 떠오르는 이 단어는 소리와 촉감의 느낌을 참 잘 반영한 것 같다. 그리고 차갑게 재단된 날 선 깔끔함이 아닌, 따뜻하게 구겨진 자연스러운 주름에서는 기분 좋은 바스락 소리가 난다. 그래서 나는 구겨진 것을 선호한다. 자연스럽게 구겨진 린넨 재킷과 마 소재의 반바지, 나일론 코트 등등. 입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런 아이템들은 어떻게 해서든 옷장 안에 넣어두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가 모아온 바스락거리는 구겨진 것들은 비단 옷들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매우 강력하게, 나는 구겨진 사람들을 내 곁에 둬왔던 것이다. 일이든 사랑이든 인생에서 한 번은 구겨져 본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구태여 숨기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선 기분 좋은 바스락 소리가 난다. 반대로 언제나 완벽한 성공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허세라는 다리미로 구김을 펴는 사람들은 너무 차가워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렇게 됐다. 세상이 다 내 발아래 있는 것처럼 기고만장하고 치기 어린 시절, 나는 단 하나의 주름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무엇을 하든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성격도 까칠했다. 항상 날이 서 있어서 가까이하기 꺼려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스스로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고 몇 번의 실패를 겪으면서 나는 완전히 부러져버렸다. 스스로 완벽한 인간이라고 믿었던 나는 불완전하고 미흡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됐다. 처음에는 충격이 컸다. 그러나 차츰 익숙해져갔다. 완벽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 결점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편안함을 느꼈다. 항상 남들을 이기기 위해 목을 매던 습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니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는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제서야 내게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조금 구겨지고 주름져도 괜찮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성숙이다. 숙성된 것이 그러하듯 성숙한 인간은 딱히 꾸미지 않아도 멋이 난다. 그리고 그런 여유와 멋을 가진 남자는 으레 린넨 재킷을 입을 줄 안다. 아직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의 입구에서 바스락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와 촉감을 느끼며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붕어빵 종이봉투를 닮은 린넨 재킷을 걸친 채로.  


by CLNA

[출처] 잡상 029. 바스락|작성자 HELLO GENTLE


작가의 이전글 [클나의 패션 칼럼]#9. 디테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