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치, 5cm 이야기
일러두기 : 흰머리 소년은 제 아버지입니다.
15년 전 뇌경색으로 한 번, 7년 전 급성 심근경색으로 한 번.
두 번의 생사를 넘기시고 저와 함께 생활하고 계십니다.
지난 초여름의 일입니다.
운동을 안 한다는 잔소리를
만 번쯤 한 것 같은데,
움직이시는 걸 원체 귀찮아하시는 분이라
몇 번 정색을 했었지요.
그러다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는
일상을 시작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흰머리 소년께서는
아침에 한 바퀴를 돌고 점심 식사 후,
또 한 바퀴를 돌고 오십니다.
제가 굳이 저녁에 같이 돌지 않아도
하루 두 바퀴를 도시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어른께 '기특하다'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그저 '잘하고 계신다'라고 했습니다. ㅎㅎ
지방 모임이 있어 다녀온 길,
집에 들어서는데 운동을 나가셨는지
흰머리 소년께서 안 계십니다.
'아 운동을 나가셨나 보다' 생각했지요.
30여 분 뒤, 집에 들어오셨는데
바람막이 잠바가 좀 낡아 보였습니다.
'날도 쨍한데, 덥지 않으세요?'
'옷을 전부 여름옷으로 바꿔 입었다' 하시며
텐션이 올라간 즐거운 목소리로 답하십니다.
방에 들어가시다가 반바지로 갈아입으시며
"작년에 입던 바지가 36인치였는데
이제 34인치를 입어도 크지 않다"라며
행복한 목소리로 자랑을 늘어놓으십니다.
그만큼 뱃살이 빠지셨다는 자랑인 거죠.
1인치가 2.54cm니까,
2인치면 대략 5cm 정도 일 것인데
그 정도면 정말 많이 빠지신 겁니다.
그럼 또 제가 칭찬을 늘어놓습니다.
제 자랑을 섞어서. ㅎㅎ
'엄청 많이 빠지신 거네요, 거 봐요.
제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뭐가 생긴다고요?' 하하하
"34인치 바지가 맞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하루 두 번 걷다 보니 다리 아픈 것도 좀 덜한 것 같고.
00(캐나다에 있는 여동생)한테도 자랑했다" 하시며
식탁에 앉아 한참 자랑하셨습니다.
그러곤 새침하게 방으로 들어가 안락의자에 앉아
리모컨을 들고 티브이를 켜십니다.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고,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관심을 갖고 맞장구를 쳐드리니까
평소 안 하시던 '혼자 말싸미'를 하십니다. ㅋㅋ
'네 계속 그렇게 재미있게만 지내세요.'
줄어든 허리띠 5cm가
흰머리 소년의 몸만 가볍게 한 게 아니라
마음을 한 뺨 더 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환한 마음에 맞장구치다 보니
저도 덩달아 웃음이 번진 오후였습니다.
그때 마음먹은 대로
여름에 입으실 반바지와 바람막이,
반소매 티셔츠를 새로 장만해 드렸습니다.
햇살을 가려줄 시원한 모자도 준비해 드렸지요.
이제 가을이 문턱에 다가왔습니다.
가을과 겨울에 입을 옷을 챙겨 드려야겠습니다.
그동안 저만 먹고사는 일을 생각해서
장만해 드린 지 오래된 건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기분 좋은 일은,
허리띠가 줄어든 만큼
우리 사이의 웃음도 늘어난다는 겁니다.
배드민턴 대회 여자 복식 8강전을 응원하시며
한숨과 탄성을 번갈아 외치시는
흰머리 소년 소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