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소년의 월동준비와 속터지기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데..

by 글터지기

퇴근해서 들어오면 언제나

식탁 위에는 검은 봉지 한나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습니다.


어느 날은 배추 두 단,

어느 날은 대파 한 꾸러미,

때로는 부추 한 봉다리 등

그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숨이 콱 막힙니다.


"이거 아직 냉장고에 있잖아요?"

"그거 다 떨어져 간다.

쌀 때 사두면 두고두고 먹지"


제가 여태 함께 살아본 경험으로는

'선입선출'보다는

'선입선 버림'이 태반입니다. 하하


오늘 저녁 식탁에는 반품으로 들어온

계란이 찜기에서 김을 내고 있습니다.


저녁에 출출할 때 하나씩 까서

드시겠다고 한 번에 열 개 넘게

찜기에 굽고 계십니다.


"조금씩만 구워서 따뜻하게 드세요" 하니

제 말은 들은 체도 안 하시고

"거기, 에어프라이어 열어봐라" 하십니다.


열어보니 군 고구마가 뙇!! ㅎㅎ


"벌써 월동준비하세요?" 하하하

"너 출출할 때 먹으라고"

한마디 던지시고 티브이 앞으로 가서 앉으십니다.


그럼 누가 먹게 될까요?

"빙고!!"

여러분 생각이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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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입니다.


지긋지긋한 더위가 언제 가나 싶었는데

문득문득 낙엽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다 분명 느닷없이 겨울이 올 겁니다.


그래서인가 우리 집에도 분주한 가을이지요.

흰머리 소년의 월동준비 덕분입니다.


지금도 베란다에 감자가 한 박스 놓여 있고,

옆에는 고구마 한 봉다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중 반은 다 못 드시고 썩어서 버릴 건데

아마 다음 주쯤 되면 또 사 오실 겁니다. 하하하


임진왜란 당시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구황작물 고구마, 감자는 시골 사람들의

든든한 끼닛거리였습니다.


강원도 산골이 고향이신 흰머리 소년은

겨울만 되면 호박고구마가 맛있다,

꿀고구마니 달다며 끊임없이 쟁여가실 겁니다.


겨우내 끊이지 않을

간식거리가 생기는 천고마비의 계절입니다.


날이 조금 시원해지나 싶었더니

속에서는 열불이 터지고 있습니다. ㅋㅋㅋ


'글터지기'가 '속터지기' 되는 줄도 모르시고

어제는 손흥민 선수가 출전하는

브라질과의 평가전이 있다며

자리를 잡고 앉으신 흰머리 소년.


경기가 시작되면 '에라이!!!'를 외치시던

그전과는 다르게 방이 조용합니다.


글을 쓰다가 전반전이 끝나는 소리가 들려

"몇 대 몇이에요?" 물어도 조용합니다.


살짝 들여다보니 티브이를 등지시고 잠이 드셨습니다.

이러면 뻔한 겁니다.

역시 '5-0' 패.


흰머리 소년을 돌아눞게 만든

축구 평가전이었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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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한 박스, 고구마 한 봉지, 계란 한 줄.

스포츠 경기 졸전에 돌아누우시는 센스.


이게 우리 집 가을 창고를 채워가는 전부입니다.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게 태반이라도

그 마음만큼은 언제나 풍성합니다.


내일은 출근하는 날이 아니니까

운동 나가실 때 잔소리 한 번 해야겠습니다.


"이젠 '무' 사 오시겠네요?

냉장고 열어보시고 운동 가시라고요~"


이 잔소리도 흰머리 소년 귀에는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 겁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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