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알자랑과 두부찌개에 깃든 따뜻함이라니

흰머리 소년의 레시피를 공개합니다. 하하

by 글터지기

퇴근해서 씻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흰머리 소년은 침대에 누워서 스포츠 티브이를 보고 계십니다. 주무시다가 일어나서 '다녀왔어요'하는 인사에 한 템포 늦은 '어~' 하는 답이 돌아옵니다. 저는 습관처럼 씻고 책상에 앉아 PC를 켜고 글이랍시고 쓰려고 하고 있는데 흰머리 소년 휴대폰이 울립니다.


전화번호가 입력되지 않은 번호는 잘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라 한참을 울려댄 후 전화를 받으셨지요. 오래전 친구분께 전화가 온 모양입니다.


"어~~. 오래간만이네.. 그래 어떻게 살고 있어?

그럼~ 나야 잘 살고 있지."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받으시는 통에 거실에 있는 제게도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카 손주가 결혼을 한 후에 싸가지 없이 연락을 딱 끊었다는 둥, 제 동생이 캐나다에 이민을 가서 얼굴 보기 힘들다는 둥 온갖 사생활이 휴대전화를 통해 전파되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었지요.


무슨 이런 사소하고 창피한 가정사까지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실까 싶었지요. 친구분이 고향은 다녀왔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럼. 며칠 전에 아들하고 벌초하러 다녀왔지.

예전에는 보트 타고 다녔어야 했는데 이제 임도가 뚫려서

차가 들어가니까 아들하고 다니지. 아주 편하게 다녀왔어."


대화중 제 이야기가 나오니까 괜히 귀가 쫑긋해지지요. 동네방네 다니면서 아들놈이 저지른 만행을 고지 곧대로 이르고 다니시는 분이 오랜만에 통화한 친구에게 혹시라도 또 흉보시지 않을까 싶어서지요.


"그래. 우리 손녀딸은 올해 대학 졸업하고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3월 5일에 원주에 있는 중학교에

발령받아서 근무하고 있어~

캐나다에 있는 손주는 학교 졸업해서 취직하고 일도 잘하고 있고~"


결국 깨알 같은 자랑이 하고 싶었나 봅니다. 이 대화를 듣고 있는데 괜한 웃음과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어른이 되면 내가 잘 되는 것보다 자녀나 손주들이 잘 되는 게 더 좋은가 봅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장장 30분이 넘도록 자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부자간 대화가 많을 리 없고 이런저런 내색 없이 지내는 사이라 이렇게 흘려듣는 통화내용에서 평소 흰머리 소년이 얼마나 손주, 손녀 자랑을 하고 싶었을까 웃음도 지어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저녁에 찌개나 하나 먹으려고 반찬 가게에서 김치찜을 한통 사 왔는데, 그거 하고 상관없이 주방에서 뭔가를 써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 김치찜 사다 놨는데 뭘 또 하시려고요?"


"두부찌개나 하지 뭐"


김치찜 사다 놨다는 소리는 듣지 않으시고 두부를 썰고 계십니다. 말은 안 해서 그렇지 흰머리 소년께서 하는 음식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 '두부찌개'입니다. 아들놈 좋다고 하니 오늘도 역시 두부를 썰고 계시는 거죠. 제가 풀무원에서 배송하고 있는데 두부는 역시 싸구려 '판두부'를 사 오셔서.. 하하하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 전화 속에 자녀와 손주 손녀를 깨알 같이 자랑하는 목소리, 저녁 밥상에 굳이 두부를 썰어 넣으시는 손길이 말없는 사랑이 아닐까. 세상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 속마음일 겁니다.


저는 그저 옆에서 흘려듣고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 속에 담긴 애정과 자부심이 미소처럼 번져옵니다.

소박하고 단순한 일상이지만 오랜 세월이 빚어낸 깊은 사랑과 온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책상에 앉아 그 이야기를 글로 옮깁니다.

말보다 오래 남을 기록이니까요.

KakaoTalk_20251003_163809651_01.jpg


*에필로그 : 흰머리 소년의 '두부찌개' 레시피


흰머리 소년께 여쭤 봤습니다.

두부찌개 어떻게 만들어요?


1. 양파를 썰어 냄비 바닥에 깐다.

2. 묵은지나 볶음 김치를 양파 위에 겹쳐 쌓는다.

3. 두부를 먹기 좋을 만큼 썰어서 얹는다.

4. 마늘과 다시다를 적당량(대충) 넣는다.

4-1 간장 세 스픈과 고추가루를 적당량(대충) 넣는다

5. 파를 썰어서 위에 덮는다.

6. 끓을 때쯤 들기름을 두 바퀴 돌려준다.

7. 자박하게 끓인다.


티브이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신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하하

keyword
이전 17화허리띠가 줄어든 만큼 환해진 흰머리 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