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빈 Apr 01. 2024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나는 왜 그토록 불행한가

<5화-그건 부모님의 성취이지 본인의 성취가 아닙니다>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11. 열한 번째 진료- (23.02.06 월요일)


“선생님 어제 유튜브를 보다가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건 아이템을 선정하고 이걸 성장시켜서 시장에 내놓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회피성향이 보이네요. 이전과 똑같이, 공부를 조금 하다가 안 되니 지금 또 사업이라는 곳으로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죠.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하고 기다려야 해요”   


12. 열두 번째 진료-(23.02.23 월요일)


“선생님 최근 아버지랑 대화를 나누다가 굉장히 큰 상처를 받았어요. 아버지가 의료기기 사업을 하시다 보니 주변에 의사분들이 많아요. 저에 관한 이야기를 주변 의사 분들에게 하셨는데 그중 한 분이 지금 망상장애 같다고 이야기하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니 어떻게 나한테 망상장애라고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화가 났어요. 저 정말 망상 장애인가요?”


“그분들은 아버지가 전해준 단편적인 이야기만 듣고 판단한 거예요. 00씨를 옆에서 계속해서 보고 있는 주치의는 저고요. 망상 장애는 아니예요. 하지만 계속해서 현실을 지각하지 못하면 망상장애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꼭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합니다. 심리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떨까요?”


“혹시 심리상담을 권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많이 상태가 안 좋을까요?”


“상담을 통해 조언을 들을 여유와 시간이 필요해 보여요. 특히 대화를 할 때 많이 호전되는 것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서 심리상담을 병행하면 치료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13. 열세 번째 진료 - (23.02.30 월요일)


메갈로마니아 (megalomania). 이승건은 종종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과대망상’이라 다소 과격함 느낌이 들지만, 더 위대하고 거대한 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경향이라 설명하면 적합할 것 같다. 자신의 역량과 선의를 확신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판단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 독선을 부릴 때도 있다. 이승건은 이러한 성향을 의식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꾸 상기하려 애썼다.

-유난한 도전(경계를 부수는 사람들, 토스팀 이야기)-


“선생님 토스 창업자 이승건 씨 책에서 스스로를 과대망상적, megaloniac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부분에서 비슷한 점을 느꼈어요”


“어떤 부분에서 유사하다고 느꼈나요?”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큰 부분, 이상주의자적 모습을 강하게 띄는 부분에서요. 또 지난주에 아버지가 제게 말한 ‘망상장애’라고 전한 이야기도 겹쳐 보였어요. 그래서 궁금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이걸 나의 무기로 만들 수 있나요?"


“제가 누차 이야기하지만 지금 00씨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주의자적 모습에, 과대망상적 모습이 비슷할 수 있죠. 그러나 아무리 과대망상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도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두 발로 제대로 서 있는 건 다른 이야기죠. 풍성한 꿈을 꾸되 현실을 정확히 바라고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면 삶의 큰 자양분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현실을 직시하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네요. 선생님 오래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요. 아버지가 쇳밥일지라는 책을 선물 주셔서 읽었어요. 그 책에는 30대 청년 용접공의 삶이 담겨 있는데 부모님은 어릴 때 이혼 했고, 성장과정에서는 가정 폭력을 당했고, 빚에 허덕이며 살았어요. 반면 저는 수성구에 마당 딸린 주택에 살면서, 사업가 아버지와 유치원 교사 어머니 밑에서 유복하게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살았어요. 운도 굉장히 좋았고요. 그런데 행복하지 않아요. 그런 저를 보고 ‘만족하지 못하는 괴물인가?’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왜 그런 걸까요?”


“그건 부모님의 성취이지, 본인의 성취가 아니잖아요. 00씨가 괴로워하고 있는 건 만족스럽지 못한 지금 나의 모습이지 타인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니깐요. 오히려 가난한 집에, 흙수저로 태어나도 자기 자신이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00씨는 더 행복했을 수도 있습니다. 집안의 유복함 즉 환경과 나의 행복감은 별개의 이야기죠.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그것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 견뎌야 할 세상은 분명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포기하지 않다보면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되면서, 누구도 감히 흔들 수 없는 자신을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 냉소하지 맙시다. 자신과 일상, 동료들과 일, 오늘과 내일을 진심으로 사랑합시다.내 주변의 내가 의식한 모든 것들이 우연이고 행운이며 이를 소중하다고 여길 때, 비로소 내 삶의 주체가 오롯하게 나가 되고, 그때가 되면 반드시 행복은 따라옵니다. 여러분 모두의 행복을 기원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평범한 이의 말씀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쇳밥일지-


이전 04화 정신과 의사에게 포르노에 대해 질문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