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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Mar 25. 2024

정신과 의사에게 포르노에 대해 질문하다

<4화- 지금의 나이 때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욕구입니다>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6. 여섯 번째 진료-(23.01.03 화요일)

“선생님 무언가 너무 두려운 것 같아요. 이 감정을 군대 가기 직전에 느낀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졌을 때 현실에서 도망치듯 잠을 자요. 잠을 잔다기보다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아요. 마치 타조가 사자에게 쫓길 때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는 ‘그래 나는 안전해’라고 자위하는 것처럼요.”


“상현 씨의 가장 큰 문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이 맞지 않음에서 괴로워하고, 자살충동이 일어난다는 것이에요. 가장 중요한 건 이 현실에, 눈앞에 놓인 상황에 집중하고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을 때 일정한 패턴을 보이면서 회피하고자 하고, 그것이 내면을 갉아먹고 있음을 나 스스로 알아차려야 해요.”


“ 저는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질일 뿐인 것이죠. 그걸 인지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고요.”



8. 여덟 번째 진료 -(23.01.17 화요일)


”선생님 질문드리고 싶었던 게 있어요. 작년에 이태원 참사가 났을 때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웃으면서 이곳에 놀러 올 수 있지? 이 사람들은 양심이라는 게 없는 건가?’ 같은 생각이 나더라고요. 엄청난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


“지금까지 진료를 보면서 느낀 건데 00 씨는 사고의 융통성이 필요해요. 이태원 참사는 가슴 아픈 일이죠. 거기는  10대 학생들부터 마약 중독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이것에 대해 추모를 표하거나, 표하지 않거나 그건 개인의 자유인 것이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으니깐요. 그날 00 씨가 일한 놀이공원에 온 사람들도 다양한 배경이 있을 거예요. 정말 그냥 놀러 온 사람도 있고, 예전부터 준비해서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다 함께 놀러 온 가장도 있을 거고요. 나의 논리적 구조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지해야 해요. 이성적이고 논리적 과정을 거쳐서 나온 생각이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대로 타인이 봤을 때 완전히 이성적이지 않을 수 있어요.”



9. 아홉 번째 진료-(23.01.27 금요일)


"이번 한 주는 어땠어요? 잘 지냈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제 좀 살만하다는 감정이 드는 것 같아요.”


“살만하다는 것이 어떤 뜻이에요?”


“하루하루가 헛되지 않았다는 감정이 들어요. 내가 뭐 하고 있지?라는 자괴감도 들지 않고요.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과연 이번 생에 가능할까 싶었어요. 그런데 치료를 시작하고 조금씩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어쩌면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너무나 혐오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의 이 모습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가며 방안을 찾으려 하고,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 방법이 안 보이는 것 같아도 묵묵히 따라가려 하고, 스스로를 관리하려 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에 행복하다. 또 이 날 성(sex)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떨렸다. 몇 날 며칠을 고민, 아니 성적인 생각을 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를 옭아맸던 하나의 족쇄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선생님 성에 관해서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네. 얼마든지요”


“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너무 힘들어요. 마치 숨겨야 하고, 감춰야 하고,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것만 같아요. 가끔씩 포르노를 보는데 이러다가 내가 범죄자가 되는 건가? 싶더라고요.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하나요?”


“00 씨 여자친구 있어요?”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의 나이 때에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욕구이고요, 지금 여자친구도 없으니 그걸 해소하고자 하는 건 당연해요. 특히 지금 00 씨 또래의 친구들이 더 명확한 성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크고요. 또 범죄를 저지르는 것 아닌지 염려했죠?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범죄자들은 현실성이 결렬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00 씨는 현실에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고요. 환기용으로 포르노를 본다고 했는데 다른 환기 방법도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요?”


성에 대한 사고는 "지금 제정신인가?"라는 반응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에 빠져서 허후적 거리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죠. 오히려 죄책감을 가지고, 숨기려 하는 것이 잘못된 사고라는 것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수십 년간 저를 옥죄어 오던 족쇄가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제가 잘못됐다는, 틀리지 않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이전 03화 이상을 낮추던가, 현실을 높이던가, 둘 다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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