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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Apr 08. 2024

지금 그건 실패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죠

<6화-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밀고 간 후에 받아들이는 결과>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14. 열네 번째 진료-(23.03.02 목요일)

"잘 지냈어요? 이번 한 주는 어떻게 보냈어요?"


"무서운 것 같아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맞을까? 내가 괜히 수능을 공부한다고 달려들었나?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00 씨는 지금의 한계를 영원의 한계로 그어버리는 성향이 있습니다. 난관에 부딪히면 ‘나는 영원히 여기까지다’하고 좌절하는 것이죠. 하지만 한계는 항상 유동적인 것입니다. 그날의 한계는 그날의 한계인 것이지 내일의 한계, 모레의 한계 더 나아가 삶의 한계라고 볼 수 없죠.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밀고 간 후에 받아들인 결과를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것이지 중간에 벽에 부딪혀 손에서 놓아버린 것은 실패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번에는 결과가 어떻게 되는 꼭 매듭 짓는 방법을,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법을 배워보길 바랍니다”


"선생님 치료를 받으면서 스스로 수치스러워질 때가 있어요. 왜 이제야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왜 지금껏 내면에 담긴 것들을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종종 들어요"


“지금 나를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잖아요. 굉장히 좋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내가 왜 회피를 했는지, 내가 왜 계속 타인의 입을 빌리려고 했는지 인지하지 못했지만 치료를 지속하면서 최소한 ‘아 내가 지금 회피하고 있구나’, ‘지금 내가 계속해서 없는 정답을 찾아가려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깐요.


"이제 치료한 지도 3달이 넘었는데 앞으로 방향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제 자신에 대해 좀 알고 싶어요.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왜 이런 사고를 하는 건지 등. 이런 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나한테 맞는 길을 찾아서 정확히 행하는 것이 정답이죠. 스스로에게 맞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해 알아야만 하고,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경험들을 쌓아가야 합니다. 00 씨는 지금 나이가 어리기에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미숙합니다. 현재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찾아가는 길목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 말도 해주고 싶네요. 시작하자마자 바로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하는 것. 그것이 곧 현실적이지 못한 사고입니다. 아직 수능까지 시간이 충분하게 남았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하나씩, 열심히 하시길 바라요. 상승곡선을 그리면 되니까요”



1. 첫 번째 심리상담-(23.02.14 화요일)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진행할까요?"


"요리를 그만뒀을 때 저를 둘러싼 주변의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숨이 막힐듯한 업무강도, 불투명한 미래, 열악한 처우. 그런데 주치의 선생님이랑 면담을 하면서 회피기제가 강력하게 작동했다는 걸 느꼈어요. 중학교 때 혐오스러운 교육제도를 회피해서 조리고등학교를 갔는데, 조리고등학교에 가서 또 회피해서 다시 수성구, 그것도 재수학원으로 돌아왔네요. 사실 대학에 가고 싶은 것도 독일에 유학을 가고 싶은 것이었어요. 그런데 독일에 가는 것도 '회피인가?' 싶더라고요. 도대체 스스로가 왜 그렇게 회피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회피와 도피가 뭐가 다른지 알아요? 회피는 ‘어.. 씨 이거 잘못될 각인데?’하고 미리 피하는 것이고, 도피는 ‘어.. 망했다’하고 상황에 직면했을 때 피하는 것이에요.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회피에도 장단점이 있어요. 단점부터 말하자면 끝까지 가서 결과물을 본 적이 없는 것이죠. 마냥 피하니깐, 실패든 성공이든 그 결과물을 볼 수 없었어요. 반대로 장점은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방어기제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피하지 않았더라면 맞이했을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독일에 가는 것도 일종의 회피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아 그리고 저번 주에 아버지가 제게 망상장애라는 말을 하셨어요. 주변에 의사분들이 많아서 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걸 들은 흉부외과 교수님이 망상장애 같아 보인다고 하신걸 전해줬어요. 정말 저 망상장애일까요?"


“ 교수님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옳지도 않아요. 결국 아버지도 그렇고 교수님도 그렇고 00 씨라는 존재의 파편화된 일부분만 본 것 아닌가요? 한 인간에 대해 알려면 전체적인 부분을 봐야만 해요. 그리고 망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어른들이 어린아이한테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고 많이 하죠? 그런데 성인이 상상력이 풍부하면 망상과 공상 사이를 오갈 수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한테 의대를 가서 의학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을 때 저는 그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충분한 검증을 거쳐서 자연스레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인데 반대로 목표를 설정하고 검증과정을 거치려 하니, 해야 할 것과 넘어가야 할 산이 너무 높은 것이죠. 그러니 지레 포기하기 쉽고요. 대구에서 서울로 가야 하는데 걸어갈 수도, 차를 타고 갈 수도,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어요. 비행기 표가 있는데 택시를 탈 필요도 없고, 버스 티켓 밖에 없는데 공항에서 기웃거리면 안 되는 거죠.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의대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의학을 배우고 싶은 건 망상이 아니에요. 다만 지금 나의 모습이 의학을 배울 만큼 충분히 공부하고 준비되어 있냐는 것이죠. 의학을 배우고 싶다면 의학을 배울 자격이 될 만큼 절대공부량이 준비되어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모습은 미래의 내가 그토록 바꾸고 싶어 하는 과거의 모습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기를 바라요. 결국 현재의 나는 과거 내가 내렸던 모든 선택의 총합이니깐요


끝으로 어떻게 되었든, 올 한 해 결과물을 꼭 보기를 바라요. 성공적 일지 실패일지는 아무도 모르죠.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입니다. 성공할 때까지 하면 실패는 그 과정이 되지만 가는 과정에서 놓아버리면 그 순간 포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을요. 이번 기회를 통해 무엇이든 끝가지 가서 결과물을 보는 경험을 가지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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