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중요한 건 그만큼이라도 노력을 했으니 이렇게라도 살고 있죠>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꾸준한 치료로 현재는 많이 회복되었고 스스로를 탐구하고 싶어 심리학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16. 열여섯 번째 진료(23.04.17 월요일)
“안녕하세요 이번 한 주는 어떻게 보냈나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근래 들어 가장 무난한 한 주를 보낸 것 같아요. 오늘은 따로 적어온 것도 없고 그냥 무탈하게 보낸 것 같아요. 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지금 치료받은 지 6개월이 지났는데 앞으로 치료 방향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요”
“성인 같은 경우 약물에 항상성이 생기는데 최소 6개월에서 1년 이상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 00 씨 같은 경우는 수능을 앞두고 있으니깐 시험을 칠 때까지 계속 면담하고 치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복용하는 약 자체도 집중력을 좀 더 강화시켜 주고 특히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적으로 잡아주니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18. 열여덟 번째 진료-(23.05.08 월요일)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제 곧 6월이고 재수 공부를 시작한 지도 6개월이 넘었는데 뭐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도대체 저라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왜 20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아직 제 자신을 잘 모를까요?”
“제가 누차 이야기했죠? 인생은 자신이 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고요. 저는 제가 한 만큼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을 노력한 것만큼 못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하면 ‘아니 의사 선생님이 무슨 그런 말을?..’이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만큼이라도 노력을 했으니 이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00 씨는 끊임없이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으려도 해요.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요. 특히나 시간이 걸리고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에 대해서요.
그리고 저는 00 씨 보다 15년을 더 살았어요. 그런데 아직도 매일매일 새로운 저의 모습을 발견하고 찾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00 씨는 지금 당장 바로 눈앞에 어떤 정답이 보이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게 아버지가 걱정하는 망상적인 모습이고요. 이게 심해지면 과대망상까지 흐를 수 있어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경험이 쌓여야 하고 다양한 경험이 쌓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리고 나이가 들어야 하는 것이죠. 지금 그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 이만큼이나 했는데 왜 내 삶은 아직도 이 모양인가?’ 그런데 바꾸어 생각하면 ‘그만큼이라도 했으니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 난 이만큼 넣었는데 왜 보상은, 왜 피드백은, 왜 결과는 이것밖에 나오지 않냐고 책망하고 자책하지 말라는 것. 단순히 지금 준비하고 있는 수능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그런 느낌이다. 지금까지 이만큼 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1%의 삶이라고 하는데, 현시대에 가장 적절한 삶이라고 하는데 왜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는가? 관점을 조금만 틀어보면 그만큼 했으니깐 이만큼 보상받고 있다. 사고를 바꾸니 세상이 겸허해 보인다. 특히나 내게 주어진 이것들이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피땀 흘려 일구어 놓은 것 위에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 나의 삶의 조각을 위해 누군가 내어놓은 인생의 삶의 조각을 잊지 말라는 것. 누군가의 꿈 한 방울, 누군가의 삶 한 조각, 누군가의 좌절 한 움큼, 누군가의 희망 한 가닥이 섞여 지금 당신이 그걸 누리고 올라탈 수 있다는 사실.”
2-두 번째 심리상담 (2023.02.20 월요일)
“잘 지냈어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회피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결국 사람의 성격은 3가지로 구성되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질, 주변 환경으로부터 만들어진 것 그리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까지. 아버지한테 반항해 본 적 있어요? 아니면 어떤 일을 끝까지 밀고 가본 적이 있을까요? 외부에서 힘으로 누를 때 보통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대처를 합니다. 그 힘에 수긍을 하던지 아니면 맞받아치던지. 문제는 수긍을 할 때 밖에서 터트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에너지를 내면에서 삭히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그 에너지는 어디로 가지 않죠. 그래서 에너지를 내면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자해를 많이 하고 자기 혐오감에 빠지기 쉬워요.
그리고 00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끝까지 더 밀고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각을 재보고 안될 것 같으면 손에서 순식간에 놓아버리죠. 금방 흥미를 잃고 허무감에 빠지는 이유는 너무 일찍 성취를 경험해 봤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무언가 얻기 위해 잃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계산해 보고, 후자가 조금이라도 크면 버리는 것이죠. 이런 무기력이 지속되면 인간관계에서나 삶의 행동양식에 굉장히 큰 작용을 할 거예요. 사실은 관계를 맺고 싶고, 친구를 만들고 싶지만 언젠가 헤어지고 언제가 다툼이 있을 것이기에 그 미래를 두려워한 나머지 시작을 못 할 수도 있어요.
이야기를 들어 보면 00 씨는 항상 실망을 해요. 조리고등학교에 갔는데 요리에 실망하고, 세계여행을 갔는데 여행에 실망하고. 어쩌면 그 배경에 근원이 되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요? 외부에서 보기에는 두 가지는 다르지만 원인은 동일한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죠. 그걸 차차 알아가기 위해,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