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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Mar 20. 2024

이상을 낮추던가, 현실을 높이던가, 둘 다 하던가.

<3화-실패란 무엇인가>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4. 네 번째 진료-(22.12.20 화요일)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번주에도 질문이 많아요. 수험생활을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나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수험생활에 임해야 할까요?”


“면담이 필요 없고 약물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2주에 한번 오라고 하고 약물 처방도 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OO 씨는 정신적으로 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이기 때문에 면담을 하는 거고, 약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죠. 심리상담과 정신과 면담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정신과 의사는 환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환자가 스스로를 알 수 있게 거울 역할을 해줘야 하는 것이죠. 여기 오는 사람들은 가게에 놀러 온 손님들이 아니라 환자들입니다. 병이 있는 환자들이에요. 특히나 그걸 알아야 해요. 정답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답이 없는 것에 정답을 찾으려는 모습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요. 지금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절대 해주지 않을 겁니다. 어떤 공식처럼 완전무결한 입시 방법이 있다면 여기 수성구 엄마들이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게 없는데 계속해서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거죠”


이 말을 듣고 굉장히 불안했고, 혼란스러웠다. 마치 첫 심리검사 결과를 보는 느낌이었다. 검사 결과 '비합리적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사료됨'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정말 허망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 한 것 같은데 그것들이 고작 '비합리적 신념'이라는 두 단어로 치부되는 것인가? 내가 지금껏 잘못 살아왔던 것인가?'라는 마음이 이곳에서도 똑같이 들었다.


”수업을 할 때 도저히 집중이 잘 안 되고 있어요. 5분만 지나면 다른 생각이 나고 특히 옛날에 함께 여행한 친구 생각이 계속해서 떠올라요. 과거에 여행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흘러가더라고요. 루틴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어서 시간을 쪼개서 잘 사용하고, 학원을 생활이 잘 맞을 거라 예상했는데 너무 힘들어요.”


“그 친구는 이성인가요? 루틴과 효율적인 삶이 지향한다지만,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OO 씨는 특히 더욱더 자유로움에 목마를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과거의 아주 자유로웠던 장면들이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고요. 지금 5분, 10분 집중하는 것도 어려운데 여유시간을 쓰고 쉬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한 달 정도는 워밍업 하는 단계라고 봐야 하죠. 저도 지금 수험생활을 다시 하라고 하면 그 생활에 집중하는데 최소 1달은 소요될 거예요. 지금 그런 건 당연한 겁니다.”


조급함. 굉장히 조급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도 이 조급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그토록 조급함을 만드는 것인가.


”선생님 스스로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종종 느낄 때 있어요. 가끔은 제 자신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가끔은 제 자신이 너무나 싫어요. “


“지금 내면에 두 개의 마음이 있고 그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인 모습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부풀려진 존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커다란 괴리감 사이에서 엄청나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고요. 앞으로 살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상을 낮추던가. 현실을 높이던가. 둘 모두 하던가.”


”그렇다면 결국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나요? 빨리 실행하고 결과를 피드백하고 다시 실행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인가요?”


“그렇죠. 자신에게 맞는 방법은 자신이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 지금 OO 씨는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군대를 조기 전역한 것, 요리를 그만둔 것을 실패라고 부를 수 없어요. 실패는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결과를 실패와 성공으로 나누는 것이지 중간에 손에서 놓아버린 것은 실패라고 할 수 조차 없습니다.”


5. 다섯 번째 진료-(22.12.27 화요일)


”선생님 지난번 진료 때 너무 힘들었어요. 마치 제 자신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너는 지금 틀린 삶을 살았어! 너는 잘못된 거야! 같이 들렸어요”


“저도 정신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 상담을 받았어요. 나의 가장 약한 치부,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정말 현금을 뭉치로 들고 갔는데 그때마다 ‘내가 지금 미쳤나? 이 돈 가지고 뭐 하는 것이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심리상담에서는 감정을 받아주고 다독여주지만 그걸 통해서 변하기는 쉽지 않죠. 진짜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고 결국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내가 변해야 하는데 그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죠. OO 씨의 계속된 상황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괴로워하고 있어요. 충분히 재능이 있고, 어떤 것이 될지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불안은 굉장히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에서 도래한 것이죠. 그래서 치료의 시작은 지금 그 간극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걸 인지하고, 특히 지금 왜곡적인 시선을 고치는 것이죠. 특히 굉장히 조급한데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들, 열심히 살았다고 한들 지금 벌써 무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닙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의대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했어요. 그렇게 의대에 들어갔지만 20대 초반의 제게는 아무것도 없었죠. 이건 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그런 거예요.”


”선생님 옛날부터 시간에 대해 엄청난 강박을 띄고 있어요. 예를 들어 6시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6시 30분에 일어나면 스스로 자책하는 것이죠. 여기서 더 나아가 ‘잠도 조절 못하는데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겠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누군가를, 무엇을 탓하고 있어요. 시간 탓, 환경 탓, 사람 탓. 20분 늦게 일어나서 하루를 망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하루에 집중을 못한 겁니다. 20분 더 잤으면 더 개운할 것이고, 20분 늦게 일어났으면 20분 더 늦게 자면서 그날의 일을 마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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