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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Mar 20. 2024

다시, 정신병원 문을 두드렸다.

<1화-늦지 않게 다시 찾아와서 다행이에요>

4년간 3곳의 정신과를 다닌 끝에 조울병(양극성 정동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듣고, 느끼고, 생각한 걸 기록하고자 합니다.



정신과 의사와 첫 만남은 군대에서였다. 입대 전 몇 달간 공허함, 우울감, 무기력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이것이 아픈 상태이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군대라는 조직에 들어가서 규칙적으로 생활한다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거라는 오판을 내렸다. 지금 살아 숨 쉬는 이 현실에서 대답을 찾지 못하면 항상 미래를 떠올렸다. 사회에서는 ‘군대에 들어가면 괜찮아질 거야’, 훈련소에서는 ‘자대 배치를 잘 받으면 괜찮아질 거야'. 군대에 들어가고 자대 배치까지 받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는 반면 엄청난 압박감이 목을 조여왔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더 이상 스스로를 못 챙길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간부에게 정신과 진료를 요청했다.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정신과 의사였지만 나는 솔직하지 못했다. 지금 죽을 만큼 힘들지만 앞에 앉아 있는 군의관에게 ‘더 이상 군대에 못 있겠습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할 용기는 없었다. 오히려 ‘군대를 빼려고 하는 꼼수로 내비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지옥을 마주했다. 타인에 의한 고통이 아닌 내 손으로 만든 심연의 구덩이로 더 깊게, 더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 연속된 고통보다 한 번의 강한 고통으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었다.


다음 해를 맞기 싫었던 12월의 어느 날 자살 시도를 했다. 바로 응급실로 보내졌지만 당시 군 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는 기기가 없어서 민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응급실과 집중치료실을 거쳐 생명에 지장이 없게 된 이후 정신과 보호 병동에 입원했다. 반입 물품들을 굉장히 엄격하게 제한하고 하루 한 번씩 개인 소지품을 검사하는 곳이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건 중학생쯤 돼 보이는 어린 친구들이 많았다. 도대체 이 친구들은 왜 이곳에 왔을까,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든 걸까. 보호병동에서 한 달간 입원하는 동안 현역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조기 전역하게 되었다.


지금껏 바라본 세상은 파편조차 찾을 수 없게 분쇄됐다. 지하철을 탔는데 소름 돋게 슬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들 행복해 보일까. 아무도 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겠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었지만 역설적으로 살고 싶었기에 정신과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기본적인 사고 활동조차 불가능했기에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부모님이 찾아주신 정신과에 진료를 보러 갔다.


두 번째 의사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어두운 조명이 비치는 방 가운데 놓인 커다란 모니터 뒤에 있었다. 아쉽게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매번 동일한 대화가 반복되니 기계처럼 느껴졌다. "1주일 잘 보냈나요? 잠은 잘 잤나요? 별일 없나요? 다음 주에 만나요" 이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치료하기 위해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인지, 그저 진료 명단에 내 이름이 있으니 짧은 대화를 하고 진료비를 받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약을 먹는지도 모르겠고, 약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도 몰랐다. 특히나 중년의 남성과 대화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수차례 병원을 방문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자의로 치료를 중단했다. 참 아쉬운 부분 중 하나가 이때 치료를 중단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거다. 물론 이 말이 '동일한 의사에게 계속 진료를 받았으면'은 아니다. 말 그대로 ‘치료’를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병원에 가보고 다른 의사를 만나보고 나에게 잘 맞는 주치의를 찾아서 계속 치료를 이어갔다면 또 삶의 궤적은 많이 달라졌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한다. 그러니 당부하고 싶다. 치료를 포기하지 말고 의사를 바꾸시라고.


치료를 중단한 이후의 삶은 돌이켜보면 폭풍 그 자체였다. 삶의 중심이 존재하지 않은 채 파도에 휩쓸려 다녔고 그 상흔에 끊임없이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그런 나를 다시 정신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든 건 한 명의 지인 덕분이었다. “저도 지금 꽤 오랜 기간 정신과를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상태가 정말 안 좋아 보여요. 저랑 비슷한 면이 많이 보여서 진짜 걱정돼요. 그러니 꼭 다시 정신과에 가보길 바라요.”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몸 어딘가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데 출혈점을 찾지 못했다. 아니 피가 터져 나와 생명에 위협을 주고 있는데 피가 터졌다는 것조차 몰랐다. 이때 옆에서 “지금 몸에 피가 철철 흐르고 있으니 빨리 병원에 가서 수술해야 한다”라고 인지시켜준 셈이다.


다시 정신과를 찾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뭘 봐야 하는지 몰랐다. 지도 앱을 켜고 ‘정신과’를 검색한 순간 주변에 정신과 숫자에 놀랐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많아진 것인가? 아니면 원래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것일까?’ 점심 먹을 식당을 고르듯 리뷰를 검색하고 집과의 위치를 고려해서 찾아봤다. 마침 동생이 자기 친구가 진료받는 병원이 있다고 추천해 줬다. 마침 여자의사인 데다 집 근처라서 방문하게 되었다.


세 번째 의사는 나랑 나이 차이가 크게 안 나보이는 매우 젊은 여의사였다. 첫 진료 때 병원에 오게 된 이유를 쭉 적어서 보여드렸다.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했고, 왜 정신과를 찾게 되었고, 왜 정신과 치료를 중간에 그만뒀는지까지.  "자살시도까지 했는데 3개월 만에 치료를 중단한 건 정말 위험했네요. 지금이라도 다시 정신과에 와서 다행입니다" 주치의 선생님이 건네준 첫마디였다. 이전의 3분 로봇 진료가 아니라 환자에게 굉장히 섬세한 관심을 가져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1년이 넘는 지금도 여전히 같은 주치의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병명을 얻게 되었고, 수능을 완주했고, 대학교에 입학했고, 마음이 이전보다 많이 편안해졌다.


자신에게 잘 맞는 정신과 주치의를 만난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찾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나한테는 이 음식이 너무 맛있지만 누구에게는 이 음식이 안 맞을 수 있다. 정신과를 선택할 때도, 주치의와 심리적 관계를 형성할 때도 이 같은 맥락 위에서 진행된다. 누군가는 약 처방을 중점으로 하는 연륜이 많은 남성 의사가 편할 수도, 누군가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적절한 피드백을 해주는 젊은 여성 의사가 잘 맞을 수도 있다. 나는 여성과 이야기하는 걸 편하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평소에 나는 어떤 사람과 대화하고 시간을 보낼 때 편안함을 느끼는지 되짚어 보면 주치의를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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