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버티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급하게 출근한 아빠 뒷모습을 보며 정후가 말했다.
"아빠는 모르는게 많더라."
무언지 몰라도 자기가 아는 사실을 아빠는 몰랐단데서 묘한 쾌감 같은 걸 느꼈나보다. 눈빛이 딱 그랬다. 그 모습이 귀여워 되물었다. "아빠가 모르는게 뭔데?"
기다렸다는듯이 방으로 달려간 큰 아이가 동생 기저귀를 들고 나온다.
"엄마. 있잖아. 분명히 컴퓨터 방에 준후 기저귀가 한 통이나 있었거든. 근데 아빠가 그걸 못 찾고서는 엄마에게 기저귀가 떨어졌다고 말하더라."
"정말? 엄마도 몰랐네. 근데 후야. 사실 그거 말고도 아이들은 알고 어른들은 모르는 일이 많더라고."
"맞아. 꼬맹이들은 알고 어른들은 모르는게 많다니. 그게 참 이상해."
큰 아이가 눈을 찡긋하며 답했다.
그 날 저녁엔 이런 일도 있었다.
"아빠. 사실은 엄마가 충격적인 말을 했어." (오잉? 뭐지? 그런 적 없는데에?)
"있잖아.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 없이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너무 좋대."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 친구들과 노는 일이 잦았던 터라, 간만에 친구들 없이 우리끼리만 있었던 시간이 나름 좋았다고 한 내 발언이 문제였다.
"우리끼리만 있는 것도 좋다."고 했는데, 아이는 그 우리끼리만을 "아빠가 없으니까"로 이해하고 나름 고민을 했나보다. 왜 바로 엄마에게 묻지 않았느냐니까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아빠한테만 말해주고 싶었어."란다.
어떤 날은 이런 대화도 나눴다.
"후야. 다른 이모들이 그러는데 요즘 정후가 좀 힘이 없어 보인대. 혹시 마음에 힘든게 있어?"
"음....."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내게 한다는 말이
"있잖아. 엄마. 사실은 말야. 준후가 잘 못해도 내가 혼나니까. 그럴 때가 많으니까. 나는. 엄마 아빠가 나보다 준후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그게 속상하고 힘들어." 며칠 전엔 40도 고열을 오가며 잠꼬대를 해댔다. "준후야! 제발 형아를 혼자 좀 내버려 둬. 내가 아무리 좋아도 자꾸 기대면 힘들다고!"
여섯살이 되니까 웬만한 대화가 다 통한다.
아이가 되려 나를 위로하고 가르친다. 물론 저의 논리와 나의 논리가 팽팽히 부딪히며 신경전을 벌이는 횟수도 더 잦아졌다. 온전한 인격으로 내게 다가서는 아이. 부모에게 귀속된 미완의 존재가 아닌, 오롯한 한 사람의 인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대단한 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때론 어른들의 위선을 들통내고, 어떤 땐 위로를, 또 어떤 날엔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는 아이의 말들.
그 말들을 듣는 일이 내겐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다.
큰 아이가 자라온 그만큼의 시간 동안 엄마로서의 나 자신도 부던히 자라왔다. 그 자양분의 팔 할은 '아이와 나눈 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로 주고받아 온 언어적 비언어적 대화 속에서 저도 나도 열심히 커 왔기에, 그래서인지 나는 유독 아이와의 대화에 집착한다. 가끔은 그런 태도로 인해 어른들에게 타박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에게 말할 공간을 확보해 주고 싶었다. 자유롭게 또 마음껏 말 할 자유와 권리를 누려 본 이가 다른 이의 말 역시 들어 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어떤 말이라도 넉넉히 받아 줄 타자를 경험하는 것이 아이 뿐 아니라 양육자인 나에게도 중요한 자산이라 믿었기에.
그런데 지난 몇 달간은 바쁜 일정으로 인해 그 말들에 집중할 틈 자체가 없었다. 주 1~2회 공동육아 교사로 참여하고, 그나마 확보되는 2~3일의 낮시간은 이런 저런 회의나 집안일로 금방 사라지기에. 주어진 발제나 토론문을 쓰려면 무조건 잠을 줄여야 했다. 가능한 아이들을 일찍 재워야 조금이라도 잘 수 있다. 그래야 그 다음 날 육아에도 차질이 없기에.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을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의 재잘거림을 놓치는만큼 울적했다. 내가 하고 있는 또다른 일들에서 의미를 찾다가도 불현듯, 충분히 들어주지 못한 아이의 이야기가 그리웠다. 그 재잘거림이,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지 모를 그 말들이 아쉬웠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일정을 확 줄이고 아이와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읽고 싶다는 만큼 읽어주고(물론 동생 때문에 충분히 다 읽지는 못했지만)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예전엔 큰 아이 혼자였는데 이젠 이제 막 말을 시작한 둘째까지 가세하자 엄청난 말의 총량이 쏟아진다. 서로 책을 가져와 상대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하고(대체로 형은 잘 기다려준다. 주로 동생이 새치기 ㅎㅎ) 서로 말하겠다고 티격대기도 하고. 둘째는 큰 아이 표현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끊임없이 늘어놓고, 큰 아이는 물 만난 고기마냥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구 쏟아놓는다. 그 소란스러움과 산만함이 왜인지 모르게 반가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란스러움과 산만함을 견딜 수 있는 내 상태가 반가웠달까.
내가 아이의 말을 들어주자, 신기하게도 아이가 타인의 말을 더 잘 들어준다. 내가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 아이를 기다려주자 아이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품어준다. 내가 아이를 용납해 주는 만큼, 저도 동생을 용납해준다. 참으로 신기한 법칙.
아무리 생각해도 육아는 힘든 것이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돌보는 일, 그 어느 것하나 나의 의지로 되지 않는 일. 좀체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 이 힘든 일을 견디게 하는 힘은 아이들이 선사하는 마약 같은 순간들에 있다. 모든 자유를 구속받고도 '그래도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이라 말할 수 있는 건 일상 도처에 숨겨진 마약같은 순간들, 소소하지만 확실한 그 행복들(소확행) 덕분이다. 그런 찰나를 붙잡을 수 없을 만큼의 극한 육아는 그 자체로 중노동이 되고, 지옥이 되기 마련이다.
민폐적 존재인 벌거숭이 인간을 기꺼이 용납할 수 있는 힘은, 민폐적 존재로서 용납받아 본 경험에서 기인한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 배우자와 나눠지는 책임, 등등. 누군가에게 안겨 본 경험으로 타자를 껴안을 수 있고, 기꺼이 용납 받았던 기억에 기인해 아이를 용납할 수 있는 법.
그런 의미에서 육아기에 가장 절실한 건 시간과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말들을 들어 줄 수 있는 시간적 여유, 서로의 부족함을 함께 보듬고 나눠 져 줄 수 있는 공동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책 한권을 또 가져왔다.
그 날 늦게 벤자민네 아빠 엄마가 벤자민을 데리러 왔을 때는
랠프와 프랜시스 둘 다 완전히 지쳐 있었어요.
"그 애는 정말 기운이 넘치는 아이야." 랠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프랜시스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소리내 이 대목을 읽어내려가자, 큰 아이가 멋쩍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엄마! 벤자민이 나랑 정말 닮았네! 나도 정말 기운이 넘치는 아이인데."
자신의 넘치는 기운을, 그래서 지치는 엄마의 상태를, 그래도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섯살.
그렇게 말해주는 큰 아이를 껴안고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 아이들이란 본래 그런 존재다. 정말 기운이 넘치고 끊임없이 우리를 지치게 하는. 그러면서도 한 없는 희망과 행복을 안겨주는 존재.
나의 아이 뿐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 모두가 저마다 마음껏 말하고 용납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변화를 위해 내가 실천 할 수 있는 오늘의 몫은 무엇일련지.
늘 끝나지 않는 고민 끝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