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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실 Jun 22. 2018

결국엔 만날 운명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날 운명이었으니까.

간만에 아이들과 퇴근한 남편을 데리러 가던 차 안이었다. 아이들이 뒷자리 카시트에 앉아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큰 아이가 말했다.


"엄마. OO 삼촌은 어렸을 때 엄마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대. 나보다 두살인가 더 많았을 때 어딘가 가족이랑 놀러 갔는데, 엄마랑 화장실을 갔다는거야. 삼촌이 먼저 나오고 엄마는 아직 안에 있어서 앞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삼촌이 잘 아는 장소라고 생각하고 나갔다가 다시 못 돌아와서 엄마를 못 만날 뻔했대."


"정말? 큰 일날 뻔 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 홈플러스에서 나온 방송 있잖아. 파란 옷에 노란 모자 쓴 아이를 보신 분은 어쩌고 저쩌고. 그걸 해 가지고 다시 찾았대."


안 그래도 오늘 '안전'에 대해 배웠다고 들은 터였다. 영아들을 챙기느라 여념 없는 엄마를 뒤로 하고 킥보드 타고 쌩쌩 달려 나가는 아이들 보며 "마침 오늘 안전에 대해서도 배웠는데 말이야."라고 걱정어린 말을 내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역시나 어른들의 기우였다. 아이는 이모의 설명을 유심히 들었을 뿐 아니라 잘 새겨 두었다 서른 세살인 나와 세살인 동생에게 자랑스럽게 가르쳐주기까지했다. 그래서 낯선 곳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느니, 등등등. 그 얘기를 하던 중 내가 말했다.


"아빠도 실은 아기 때 실종 된 적이 있었대."


"진짜? 아빠도 엄마 아빠 잃어버렸었다고? 언제?"


"몰라. 아마도 정후 나이쯤?"


"어떻게 됐어?"


"다행히 찾았는데, 하마터면 못 찾을 뻔 했지. OO 삼촌이나 아빠처럼 다시 돌아오는 아이는 많이 없어서."


"진짜 다행이다."


"만약 그 때 아빠가 할머니를 잃어버렸으면, 고모랑 같이 못 살았을 거고 그럼 엄마랑 아빠가 만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러면 후야랑 뚜뚜도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겠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 말을 들은 아이가 의아하다는듯이 내게 되물었다.


"아닌데?

 엄마. 만약 아빠가 (아빠의) 엄마를 잃어버렸어도

결국 엄마(=나, 정후엄마)를 만나게 됐을거야.

엄마가 인천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골목에서라도 어떻게든 그렇게 만났을거야."


아이의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그 말을 계속되뇌였다.


맞네. 그렇네. 정말 맞네.

우연히, 그렇게라도 만났을거야.

그래야.

후야와 뚜뚜가 이 세상에 왔을테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날 운명이었으니까.


남편과 나는 내가 열 세살, 남편이 스무살이었던 1998년 겨울에 처음 만났다. 나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그는 대학 신입생 신분으로 삼촌이 운영하는 외국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원어민이 있는 학원이어서 용돈도 벌고 영어공부도 하려고 와 있었는데, 아직도 영어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걸 보면 필시 영어보단 나와 만날 운명에 이끌려 남원에 와 있었던거겠거니 한다. 교복을 처음 맞춘 날, 자전거를 타고 그에게 갔다. 내 기억은 흐릿한데 그의 기억은 선명하다. 자전거에서 내린 내가 마치 바바리맨처럼 코트를 벗더니, 교복을 입은채로 한바퀴 뱅그르르 돌다


 "교복 입은 모습, 처음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란 말을 남기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갔다 했다. 그리고 이 장면 역시 나는 기억나진 않지만, 학원 행사로 함께 스케이트장을 갔던 일이 있었는데, 오가는 버스에서 내가 그 당시 유행하던 타이타닉 주제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자꾸만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고 (그는 주장한다 '나 좀 봐. 이렇게 노래 잘하지?'하면서.. 아마 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구태여 부정은 하지 않는다 .스물 넷의 성탄이 되기 전까지, 내게 늘 키다리 아저씨였던 그와 부부가 돼 어느새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 한 집에서 산다. 엄마 아빠와 살아 온 시간에 몇곱절의 시간을 그와 살겠다 다짐했다. 추억들을 더듬다 보면 아이의 말대로 우리 결국 '만날 운명'이었구나 한다.


우리 눈엔 고작 여섯살인 아이에게도 제 나름의 추억이 싹트고 있다. 그 와중에 저의 만날 운명도 스치고 마주치고 그러다 헤어도지고 다시 만나는 거겠거니.


며칠 전 아이들 하원시키러 가니 이모 몇명이 내게 따로 귀띔을 해주었다. 친구 중 한 명이 아이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고 처음엔 도망가던 정후가 결국엔 못내 좋은듯 체념하며 "그럼 그렇개 해야지 뭐"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을 통해 생생하게 그 순간의 전언을 들었다. 가장 신난 목격자는 아이들이었다. 그 와중에 나름의 치정도 얽혀 있었다. 사뭇 들뜬 그러면서도 진지한, 쑥쓰럽고 재밌고 설레고 부끄럽기도 한 아이들의 복숭아 같은 반응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아름답고 순수한 이 시절을 어렴풋이라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몇 자 적어둔다. 훗날 기억조차 나지 않을 이 시절 첫 고백의 기록. 너희 결국엔 만날 운명이라면 이 날의 기록 또한 운명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겠지 하면서. 혹여 아니래도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유년의 추억으로 함께 깔깔 웃을 수 있길 바라며. (아이들 이름은 가명으로 대체)


"나는 나무 오빠랑 결혼할거야."


"그런데 기쁨이는 원래는 호호랑 결혼한다고 하다가 이제는 나무랑 결혼한다고 해요."


"호호랑 결혼은 안 했잖아. 나는 나무 오빠랑 결혼 할거야."


"기쁨아, 그런데 결혼하면 엄마 아빠랑 같이 안 살고 결혼 한 사람이랑 같이 살아야 하는거야."


"응"


"그래도 괜찮아?"


"응. 그래도 할래. 지금은 안되고 시월(십월)부터 나무 오빠네 집에서 살래."


"진짜? (사실은 나무 오빠네 집으로 와서 사는게 아니고 결혼한 너희  둘 다 엄마 아빠랑 헤어져서 둘만 같이 사는거란다)잘 생각해 봐. 엄마한테 말해도 되는거야?"


"..... 음. 아니. 엄마한테는 비밀.흐흐흐"


"기쁨아. 그런데 이모는 기쁨이가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해서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건 놀릴 수 있는게 아니야.(아이들 모두에게 하는 말) 그리고 이모도 어렸을 때 결혼하고 싶었던 친구 있었어."


아이들 : "누군데?" "그래서?"


"근데 창식이 삼촌이랑 결혼했지. 기쁨이도 언제든지 마음이 달라질 수 있어. 우리 모두 그런거야."


나무 : "나는 처음에는 싫다고 도망갔는데. 기쁨이가 계속 결혼하자고 해서 알았다고 했어."


 "나무도, 기쁨이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거나, 다른 사람이 좋아해주면 좋은거지만. 마음이 언제든 바뀔 수도 있는거야. 그리고 나를 좋아해주는 친구랑 꼭 결혼 안해도 돼.  서로가 서로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더 좋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최고로 좋아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하는거야."


"그런데 우리끼리 결혼하면 서로 서로 가족되겠다."


"나무사랑이랑 결혼하고, 별이반짝이랑 결혼하면. 그럼 햇님이(반짝이의 오빠)랑, 나무(별이의 형)랑, 나(튼튼이=사랑이와 기쁨이의 오빠)랑 다 가족 되네."


기쁨: "내가 나무 오빠랑 결혼한다니까."


튼튼 : "아니면. 나무반짝이랑 결혼하고. 어쩌고 저쩌고."


기쁨: "내가 한다니까. 나무 오빠랑 결혼!"


성실 : "튼튼아. 기쁨이가 나무 오빠 얘기하는데 왜 자꾸 일부러 다른 동생 이야기 하는거야?"


튼튼 : 크크크크


성실 : 놀리려고 그러는거지?


튼튼 : 흐흐흐흐흐


성실 : 튼튼이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 있어?


튼튼 : (생각)


성실 : 누구랑 결혼하고 싶어?


튼튼 : 나는 밖에서 찾아야지.(공동육아 밖을 말하는듯)


성실 : 푸하하하. 여긴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튼튼 : (끄덕끄덕) 그런 것 같아.


성실 : 근데. 아직은 결혼하려면 많이 남았어. 그래도 기쁨이가 나무오빠랑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건 정말 멋진 것 같아.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먼저 말할 수 있는게 져. 나무오빠를 좋다고 해서 그것도 좋았어 (푸하하하. 꼭 내 아들이어서만은 아니고 라고 하면 거짓말인걸까 ㅎㅎ)


<놀이터로 이동>

한참 놀다 기쁨이가 성실 옆에 앉아서 다시 대화가 시작.

 

기쁨 : 그런데. 아까. 나무 오빠가 신호등 건널 때 내 손 잡아줬잖아.


성실 : 그래서 좋았어?


기쁨 : 응.


성실 : 그런데 기쁨이는 이모가 물어봐서 괜찮아?


기쁨: 응. 좋아.


성실 : 그럼. 한가지 더 물어봐도 돼?


기쁨 : 응.


성실 : 근데 기쁨이는 나무 오빠가 왜 좋아?


기쁨 : 음. 나무 오빠랑 싸움 놀이도 하고 그래서 좋아.


성실 : 괴롭히고 놀릴 때도 있잖아. 그래도 괜찮아?


기쁨 : 응. 그리고 어쩌고 저쩌고 (참 얘기를 진행...)


성실 : 근데. 언제부터 좋았어?


기쁨 : 옛날부터.


<며칠 뒤 나무의 이야기.>


자려고 누웠는데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근데. 이상한게 있어. 튼튼이 형은 기쁨이가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는데도 계속 사랑이나 반짝이 얘기만 꺼냈잖아. 왜 그랬을까?"


"그러게 엄마도 궁금하다. 후야. 후야는 기쁨이랑 결혼하고 싶어?"


(고민....)


" 엄마가 물어보는거 싫으면 안 물어보고 싶어. 솔직히 말해줘. 엄마가 물어본다고 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거야."


"말하고 싶어. 엄마한테는."


"그럼 아빠한테 말해도 돼?"


" 안 돼. 그건 아니야."


"왜?혹시 쑥쓰러워?"


(끄덕끄덕)


"알겠어."


"나는 기쁨이가 말해서 싫진 않았는데.........

근데 열살까지는 생각해보고.

그 때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땐 기쁨이랑 결혼해야지."


그 뒤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결혼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나는 누구랑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


어젯잠엔 기쁨이가 나무 오빠랑 결혼하면 엄마와 헤어져 살아야하니 너무 슬프다며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그래서 결혼을 안 한다고는 안하고 그래서 슬프다고 울었다는 아이 이야기가 두고 두고 떠올라 하루 종일 엄마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상상하는 결혼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나무 오빠와 결혼하면 5인방으로 늘 같이 다녔던 나머지 세 오빠들은 어떻게 하냐며 오빠들 신변까지 걱정해주었다 한다. 후야도 싫지는 않은 내색이다. 오늘은 기쁨이가 결혼하자는 말을 안했다고 더 좋다면서도 또 차근히 물어보면 말만 그렇지 적극적인 기쁨이의 공세가 싫지 않은 눈치다. 한켠으로 좋기도 한 눈치.


꼭 연인이 부부가 아니더라도 결국엔 만날 운명, 어떤 모슴으로든 서로 북돋고 도닥이며 오래 인생 길벗하는 친구이기를.


오늘의 일만큼은 꼭 적어두고 싶어 결국 누워 일기를 끄적인다. 그리고 오늘 하루 마무리하며 엄마 미소를 배시시. 내일은 조금 더 넉넉하게 한 번 더 안아주고 조금만 후회해야지. 잘자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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