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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실 Aug 11. 2024

남의 장단, 나의 파도

엄마의 여름방학

괜찮아. 방금 지나간 건 내 파도가 아니었어.

서핑을 하던 아이가 말했다.



바람이 거의 없는 날, 어떤 파도든 살려 보려고 애쓰던 중이었다. 간만에 다가오는 파도를 보며 아빠가 아이들에게 소리친다.

"얘들아, 준비해. 거의 다 왔어."


용케 파도를 치고 나가는 둘째와 달리, 서두르는 기색이 없던 큰 아이. 조바심에 내가 한 번 더 귀띔하자 한다는 말이


괜찮아. 방금 지나간 건 내 파도가 아니었어. 라고.


그리고선 다음 파도를 따라 힘차게 달려 나갔다.

흔히들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고,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고,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고, 부모가 자녀를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러나 배움은 도처에 피어 있는 들꽃과 같아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를 마주하고 감동시킨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게 어른을 깨우치는 아이들.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기로 마음 먹다가도

남들이 다 장단 맞춰 춤을 추면 불안해지기 십상이고,

준비가 되어 있든 아직이든 내 파도든 남의 파도든 뭐 하나라도 붙잡아야만 할 것 같은 그 조급함에 버텨 서기가 좀체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날 법도 한데 태연히 자기 속도대로 서핑하는 아이가 어제 하루의 내 선생이었다.


흔히들 로스쿨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방학이 1학년 여름이라고 한다. 민법의 기틀을 갖추면서, 민사소송법을 준비하고, 다음학기 들어야 할 형법 등을 준비하고 변호사시험 응시를 위한 자격시험이라고도 볼 수 있는 법조윤리 시험에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 부모인 나로서는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가 여름, 겨울 방학이므로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7월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아이들과 떨어져 지낸 4개월의 후폭풍과, 허리와 고관절 통증으로 겨우 수강해야 할 강좌만 따라 들은 것 같다. 그 와중에 1주일의 가족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기에 한켠 무거운 마음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물놀이를 어느 시간대 하고, 개인 공부는 어디서 언제 해야 할 지 무의식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비행기 밖 풍경을 만끽하던 뚜가 속삭였다.

"엄마, 하늘의 구름이 엄마를 닯았어. 너무 예뻐."

그리고 다시 공상에 빠져들어, 구름 사이 사이에 숨은 용암과 괴물을 찾아 떠나는 아홉살 어린이. 그 모습이 아까워 사진에 담는 나.


여행 이틀 전날은 둘째의 생일이었다. 파티도 할 겸 외식을 마치고 돌아와 잘 채비를 하는데, 총총총 큰 아이가 다가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쉿. 엄마. 준후에게는 비밀인데.

준후를 동생으로 낳아줘서 고마워.

오늘 준후 생일이잖아.

엄마가 고생해서 동생 낳고 길러줘서

나한테 제일 좋은 친구가 있는거잖아.

서로 감시도 해주면서(게임 중독이 되지 않도록 ㅋㅋ)"


비밀로 해달라는 수신호를 남기고 총총총 쿨하게 떠나가는 그.

어제는 네가족이 제주에서 마지막 외식을 했다.

아이들 해산물을 바지런히 발라주고나니 정작 우리가 먹을 게 없었고 칼국수 사리를 추가하려니 시간이 길어졌다. 먼저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알아서 숙소로 돌아갈 수 있다길래 믿어보기로 한다. 어둑한 시골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으려나 약간 걱정도 됐지만. 이십분 남짓 지났을까. 큰 아이에게 걸려 온 전화.


" 엄마, 우리 어디게? 바로 코아흐(숙소) 앞이지!

한 번도 안 헤매고 바로 숙소를 찾아왔어.


비법은 에피소드야.


어제 그제 산책하면서 골목마다 에피소드를 기억해뒀거든. 엄마랑 유튜브 컨텐츠 이야기한 골목, 아빠가 웃긴 말 한 데, 부산 엄마 집 앞 고깃집과 닮은 식당이라고 우리가 말했던데. 그렇게 코너 돌고 돌다보니 이제 집이야.


우리 걱정 말고 둘이 오붓이 데이트 마치고 집에 천천히 오세요!"


헨젤과 그레텔이 돌멩이를 남겨놓듯. 우리가 주고 받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아이들을 이끌어 안전히 집까지 데려다 준 셈이다. 우리가 함께 합을 맞춰 온 지난,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시간들 또한 그러하리라.


아이들이 먼저 귀가한 밤, 해변을 따라 밤마실을 하면서 문득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네가족이 여름휴가를 갈 수 있을까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큰 아이가 열두살. 어쩌면 다섯번. 길면 열번이 되려나. 남편과 그 이야기를 나누며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진 밤.

사랑이 낡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런 시대에,

그럼에도 '사랑'을 붙잡는 나에게 와 준 아이들.

진짜 사랑을 가르쳐 준 어린 선생들을 만나러 서둘러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비록 마음 먹은만큼 공부하지 못했어도,

체력도 암기력도 이전같지 않아도


남의 파도에 조급해지지 말고.

오로지 나의 파도를 타고 일어서자.


이 다짐이야말로 제주가 내게 준 선물이다.


아, 하나 더 있다.

아들이 깜짝으로 선물한 목걸이.

이 다정함으로 누군가를 또 열렬히 사랑할 너를 응원하며, 오늘은 내가 그 영광을 만끽할게. 고마워.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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