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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솔로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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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영 Sep 30. 2022

이혼 거부한 엄마, 난 흉기가 될 물건 치우라고 했다

[양민영의 한 솔로] 8화 가족 트라우마2


"범죄 전문가도, 격투기 전문가도 아닌 제가 여성의 자기방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저 역시 폭력이 발생한 가정의 피해자이고 이 심각한 사회문제의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성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인사와 함께 발표를 마무리하고 녹화 중지 버튼을 눌렀다. 내가 대표를 맡은 예비 사회적기업이 한 지원사업의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면접 전형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 사업의 아이템인 여성의 자기방어 프로그램에 관한 경쟁 프레젠테이션 영상을 제출하기 위해서 같은 멘트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폭격으로 엉망이 된 가슴을 내버려 두고 발표에 적지 않게 공을 들였다. 굳이 사적인 사정까지 들먹인 건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는 계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절 능력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일상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전까지 나는 주저앉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고비 앞에서도 무력하게 무너진 적은 없다. 그런데 그 일을 겪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존재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무가치하고 살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별다른 저항도 없이, 일사천리로 전개되어 당혹스러웠다. 


어떻게든 나를 사랑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이제 겨우 그 방법을 알 듯도 한데 이렇게 망쳐버리다니. 내 모든 분노와 억울함을 쏟아낼 유일한 사람,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다가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마침 그는 혼자였다.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소처럼 '왜'라는 짧은 말로 용건을 물었다. 나는 다짜고짜 당장 엄마와 이혼하라고 소리쳤다. 내가 폭행과 이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마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방어하기 시작했다. '네까짓 게 뭔데 감히 이혼하라 마라고 하느냐'는 말을 시작으로 대화라고 할 수 없는 고함과 맹렬한 비난이 오갔다.


상처


우습게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자신에게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설명하느라 바빴다. 마치 내가 설명을 다 듣고 나면 '그럴 만합니다'하고 설득될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이걸 대화라고 떠들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제야 어떤 말로도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는 별안간 씹어뱉듯 말했다.


"알았다, 나가서 확 죽을게!"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가 빌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용서해달라거나 잘못했다고 말할 리 없는 사람이다. 구제받을 길 없는 머저리나 실패자들이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쉬운 말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가까운 피붙이에게 버려진 실패자가 된 걸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런 채로 나만 새삼스럽게 상처받고 말았다.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알고는 있을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상처는 마땅히 사랑이 오가야 할 관계에서 발생한다. 언제나 사랑이 가장 강력하고 아픈 족쇄다.  


오랜 세월 부모의 문제에서 발을 빼지 못한 것도 사랑 때문이었다. 지금도 수많은 가정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듯 나 또한 딸이라는 이유로 엄마가 처리하지 못한 분노와 슬픔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고 불행한지 헤아렸고 그의 슬픔, 분노, 고통을 나눠 가졌다.


나는 사람 사이의 경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처럼 생각하고 엄마처럼 느꼈다. 엄마는 나였고 내가 엄마였다. 어떨 때는 어린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기도 했다. 


남편과의 불화, 뻔뻔스러운 시가, 끝내 엄마를 상속에서 제외한 엄마의 부모와 남동생. 나는 기꺼이 엄마처럼, 아니 엄마보다 더 맹렬하게 그들을 미워함으로써 완벽한 동맹이 되고자 애썼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아들인 오빠만큼 사랑받을 수 없는데, 엄마의 감정에 이입하는 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한숨과 원망 섞인 하소연을 시작하면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진심으로 엄마의 적들을 미워했다. 항상 관심과 애정에 목이 말랐기에 그 역할이라도 잘해서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실패




사고가 열두 살쯤으로 돌아가자 나는 그 옛날처럼 엄마와 나를 동일시했다. 아버지가 엄마가 아니라 나를 폭행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달려들던 그 무서운 얼굴이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했다. 


엄마가 이혼하도록 설득하다가 끝내 실패했을 때(엄마는 이혼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당부했다. 집안에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을 미리 치우고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이야기는 집 밖에서 하라고, 폭행이 재발할 때를 대비하라고. 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지경까지 온 걸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그저 남자일 뿐, 괴물은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때로는 엄마가 끝내 거부했던 애정을 대신 채워주기도 했다. 특히 내가 비혼을 결정하고 엄마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을 때 그는 내 뜻을 받아들였다. 내가 첫 책을 출간했을 때도 이상할 정도로 냉랭한 엄마와 다르게 크게 기뻐했고 아직도 그의 메신저 프로필에는 내 책의 커버가 걸려 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일평생 가장 사랑한 사람이 만 4세 무렵의 나라고 확신한다. 세상에 다시 없을 이 딸바보는 그 애의 일부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짓밟고 망가뜨렸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망가졌는지도 모른다. 가장 사랑해준 사람을 온전히 믿고 존경할 수 없는 데서 출발한 애착 관계는 항상, 언제나 엉망이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구하는 일에도 실패했다. 엄마는 내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날아가고 싶다, 혹은 사라지겠다 같은 감상적인 말만 늘어놓으며 울화를 돋구었다. 날아갈 게 아니라 그 집에서 걸어 나오라는데, 사라지지 말고 남편을 버리라는데. 나의 외침은 엄마 내부에 구축된 여성혐오의 벽에 부딪혀 단 한 번도 재고되지 못하고 허망하게 흩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가정의 달로 부산스러운 5월을 맞았다. 지원 사업에는 끝내 떨어졌다. 그 일이 특별히 안타깝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나는 며칠 뒤에 엄마에게 200만 원을 부쳤다. 지난 연말에 빌려 쓰고 갚기를 미루던 돈이다.


"돈을 잘 갖고 있어. 아무한테도 주지 마."


엄마는 그러겠다고 했다. 당연히 '아무나'에는 나도 포함된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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