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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솔로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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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영 Oct 14. 2022

칼 쓰는 남자,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을 줄 알았다

[양민영의 한 솔로] 10화 모르는 맛



"칼 쓰는 남자랑 만나다가 칼 맞으면 어떡하니?"

십 년 전쯤 절친한 선배 언니에게 직업이 셰프인 A와 사귄다고 했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질문이 돌아왔다. 보통은 후배가 사귀는 남자를 두고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게 예의겠으나 그 무렵에 우리는 둘 다 소설을 쓰고 있었다.


시종일관 불길하게 전개되다가 결말에는 모든 게 파탄 나는 재수 없는 내용의 소설을 써서 서로 바꿔 읽곤 했다. 자연히 우리는 안톤 체호프의 명언대로 '소설에 권총이 등장하면 그 권총은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우리 인생이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A는 왜 내 삶에 등장한 걸까? 그는 칼을 쓸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데뷔한 적도 있었다. 갑자기 그의 검은 피부, 특이한 눈매, 약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고집과 그리 좋지 못한 성격이 심각한 위험 요소로 느껴졌다. 기필코 한 번은 발사되는 권총처럼, 아직은 우연처럼 보이는 요소가 개연성의 법칙에 따라서 나를 위협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전부 하나마나 한 생각이었다. A를 처음 봤을 때 내 안에서 살던 어린 여자애가 '빨리 저 남자를 사랑하라'고 종용했다. 사랑이 경쟁은 아니지만 돋보이는 남자를 가지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체호프 때문에 관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몰라, 맛있는 걸 먹으면 그만이야.'



모르는 맛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A는 한번 발동이 걸리면 쉬지 않고 무엇을 굽고 튀기고 볶았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부엌을 더럽히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가스레인지 주변이 넘쳐흐른 액체와 기름으로 번들거리고 탄내와 매캐한 연기가 온 집안을 채우다 못해 툭하면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손수 사놓은 재료의 반절 이상은 뭉텅 잘려서 개수대에 버려졌다.  


그는 마치 밀린 주문에 쫓기듯 그 모든 과정을 빠르게 해치우는 데 필사적이었다. 무쇠 팬을 잡은 손이 떨릴 때마다 덩달아서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손에는 짙은 갈색으로 착색된 화상과 자상 흉터가 다섯 개나 있었다. 여성들의 클래식한 로망, '내 부엌에서 요리하는 남자친구'와 막상 대면하고 보니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았다. A가 또 손을 썰거나 튀길까 봐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야단법석 끝에 음식이 완성되면 그는 아주 뜨거운 음식을 손으로 덥석 집었다. 특별히 잘 만들어진 조각을 골라서 입 안에 넣어주고 와인잔을 기울여서 마시게 한 다음 정해진 의식처럼 맛있냐고 물었다. 


섬세하고 다채로운 맛,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세상을 긍정하게 되는 맛이 거기 있었다. 나의 미뢰에, 음식이 머금은 화기에, 공기 중을 떠도는 냄새 입자에, A의 자신만만한 눈 속에. 아기의 얼굴을 보면 저절로 미소지을 수밖에 없듯 논리가 통하지 않는 맛이었다. 


나는 신실한 전도사인 A를 따라서 새로운 세계에 입장했는데 그 세계의 이름은 '모르는 맛'이었다. 모르는 맛의 대립항은 우리 모두가 열광하는 '아는 맛'이다. 단언하는데 모르는 맛은 절대로 아는 맛을 이길 수 없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미셸 자우너가 쓴 <H마트에서 울다>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는 맛에 얽힌 추억, 익숙함을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뇌에 각인된 아는 맛은 유년기에 극진하게 사랑받았던 기억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적의 아는 맛에도 약점은 있으니 너무 한결같고 지루하다는 거다. 예를 들어서 나는 초장이라는 아는 맛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는 해산물이 많이 나는데 거의 모든 해산물에 짜고 시고 매운 맛을 곁들인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초장을 찍어 먹거나 고춧가루와 간장을 넣은 조림, 그 좁은 범위를 벗어난 새로운 해산물 레시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본가에 가면 아버지는 내가 생선회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남을 만큼의 생선회를 사 들고 온다. 여기에 양파와 청양고추처럼 맵고 향이 강한 채소를 듬뿍 넣고 예의 강력한 초장을 넣어 마구 버무리면 해안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터프한 스타일의 회무침이 완성된다. 그 회무침을 30년도 넘게 먹어온 나는 언젠가부터 입으로는 회무침을 먹으면서 머리로는 카르파쵸(이탈리아식 생선 초회)나 뽈뽀(스페인식 문어 샐러드)를 떠올렸다.


 

터프한 회무침 초장이라는 아는 맛에 질려버렸다 ⓒ 게티이미지뱅크


새로운 맛

그 사이 A와는 손쓸 수 없이 어긋나다가 순식간에 헤어졌는데 그는 패잔병처럼 급히 떠나느라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다. 내 인생은 체호프가 설계한 견고한 세계가 아니라서, 다행히 칼을 맞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개연성의 논리에 따라서 무쇠 팬, 말돈 소금, 그리고 일본 칼이 부엌에 남았다. 


한때 그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말했지만 가당찮은 헛소리였다. 전쟁의 폐허에서 추억과 잔해를 뒤지던 나는 모르는 맛을 발견했다. 모르는 맛의 세계를 계속 탐구하고 과업을 완성할 유일한 사람, 그건 바로 나였다. 가진 능력을 전부 동원해서 나에게 새로운 맛을 선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내가 모르는, 어떤 추억과도 얽히지 않은 가장 멀리 있는 맛을 향해서 떠났다. 항해를 위한 길잡이별은 넘치도록 많은데 특히 책장에 꽂힌 요리책 가운데 가장 크고 무거운 <패밀리 밀>을 좋아한다. 이 책은 스페인의 스타 셰프인 페란 아드리아가 운영하는 전설적인 레스토랑 엘불리의 스태프들이 먹는 '스태프 밀'(직원용 식사)의 레시피를 기록한 레시피북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음식의 맛을 완벽히 구현해도 오리지널이 어떤 맛인지 절대 확인할 수 없다. 오래전에 엘불리가 폐업한 관계로 레스토랑에 갈 수 없고 가더라도 스태프가 아닌데 어떻게 스태프 밀을 먹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아주 좋아한다. 모르는 맛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지 않은가? 그래서 가끔 맛있는 게 먹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때 책에서 소개하는 31가지 레시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버터의 순결함, 올리브유에서 풍기는 꽃향기, 닭의 갈비뼈 끝에 붙은 '오이스터(굴)'이라고 불리는 간의 맛, 소금과 지방과 산이 만들어내는 맛…. 모르는 맛에는 한계가 없다.


그리고 불 앞에 선 나는 주저하고 의심하는 본성마저 버린다. 재료를 썰고 끓이고 볶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메케한 향이 번지는 일련의 야단법석을 즐기다 보면 없던 배짱도 샘솟는 것 같다. 잘못해서 음식을 망치면 뭐 어떤가. 우리 인생의 모르는 맛은 무궁무진하고 설거지 한 번이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던 실패도 마치 없던 일처럼 복구할 수 있는데.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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