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영의 한 솔로] 7화 가족 트라우마
탈모가 진행 중인 사람은 남의 머리만 본다. 차를 사기로 마음먹으면 점찍어둔 차종만 보이는 것처럼. 나는 가족으로 보이는 무리를 유심히 본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함께 걸어가는 평범한 모습에 눈이 간다. 저 사람들은 화목한가? 별일 없이 살고 있을까.
우리 집은 그리 화목한 편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 을 인용하지 않아도 원래 화목한 가정이라는 건 드물다.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도 가질 수 없는 환상이나 다름없다고 냉소하면 내가 화목한 가정의 일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덜 아쉬웠다.
그래서 우리 집을 떠나지 않던 고함과 감정적인 학대도 보통 가정에서 발생하는 평범한 갈등이라고 믿었다. 보통의 한국 남자보다 조금 더 그악스러운 남자와 무시와 냉대를 견디며 혐오를 내면화한 여자가 만든 가정은 그리 드물지 않다. 이렇게 안일하게 믿고 덮어버리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부모에게서 독립한 지 20년도 더 되었고 본가는 차로 네 시간쯤 가야 도착하는 거리에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부모님을 기껏해야 일 년에 두세 번 만나는 게 고작인데, 그들은 그처럼 멀리서도 내 가슴을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찢어놓았다. 인생을 통틀어서 최악의 소식을 전한 사람은 뜻밖에도 외삼촌이었다. 엄마의 막냇동생인 외삼촌, 나는 그의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카카오톡 메신저로 느닷없이 알 듯 말 듯 한 메시지를 보냈다. 너무나 수상쩍은 연락만으로도 큰일이 벌어진 걸 알 수 있었다.
통화를 하면서도 그는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스무고개 같은 질문이 오가고 나서야 엄마가 폭행당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칠순을 넘긴 내 아버지가 칠순이 머지않은 엄마를 때렸다는 거다.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진 것 같았다.
시간은 10시가 넘었고 빗방울이 가늘게 떨어지고 있었다. 지하철 출구와 버스 정류장, 횡단보도가 어지럽게 얽힌 교차로에서 사람들은 제 갈 길을 찾아 빠르게 흩어졌다. 그날따라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나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무작정 걸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어둡고 축축한 감각이 온몸에 단단히 들러붙었다. 강렬한 기쁨이나 사랑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고통이야말로 영원하다고. 캄캄하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도망치는 사람처럼 쉬지 않고 걸었다. 잠시라도 멈추면 버려진 우물처럼 방치해뒀던 어둠이, 그 심연이 온몸을 송두리째 삼킬 것만 같았다.
▲ 시간은 10시가 넘었고 빗방울이 가늘게 떨어지고 있었다. ⓒ 게티이미지뱅크
그때까지도 나는 잠깐이라도 좋으니 우리 집에서 벌어진 일을 부정하고 싶었다. 외삼촌에게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내뱉은 멍청한 말도 '두 분이 자주 다투기는 해도 폭력은 없었다'였다. 그러나 음성이 신경으로 전해지는 순간 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건 아버지를 향한 신뢰나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내가 속한 가정에서 폭력이 벌어진 걸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당한 방어기제라고 하기에는 도저히 두둔할 수 없는 사람의 죄를 두둔한 셈이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임을 모르지 않았다. 모르는 척 연기조차 할 수 없다. 집안에 공기처럼 존재하던 미묘한 폭력과 학대가 평생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학대, 언어폭력이 그토록 빈번한데 어떻게 물리적인 폭력이 없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죽거나 미쳐버리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을 것도 같았다. 몇 년 전에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개최한 영상 콘텐츠 공모전에 참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24시간 상담이 가능한 1366에 전화를 거는 게 내가 당장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였다.
상담원은 먼저,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분명히 처음이 아닐 거라고 말했다. 이어서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피해자를 가해자와 분리하는 게 급선무'라고 일러주었다. 그가 상식적이고 적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내 대답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엄마의 나이와 거주지에 관한 정보만으로 아마 피해자 본인이 신고를 원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결론은 이 일이 가정폭력이자 노인학대이므로 노인 보호 시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엄마를 설득해야 했다.
▲ 눈을 떴을 때 한층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현실만 남아 있었다. ⓒ 게티이미지뱅크
"괜찮아."
자정이 넘어 전화를 걸었을 때 엄마는 1998년에 갑상샘암으로 한쪽 갑상샘을 도려냈을 때, 혹은 2015년에 어깨뼈에 자라던 종양을 긁어냈던 때처럼 말했다. 그 말은 나를 위로하려 한다기보다 엄마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넋두리처럼 들렸다.
지난 40여 년 동안 엄마는 변함이 없다. 두 번의 암을 이겨냈듯 여전히 강하고 오히려 그 강인함 때문에 미련하고 또 미련하다. 그래서 결혼 생활 내내 피해자였으나 피해로부터 자신을 구제하지 않았다. 엄마가 피해 속에 자신을 방치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엄마는 일생에서 딱 한 번, 두 살 위인 오빠를 가져서 배가 불렀을 때 자신을 구제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만삭인 배 때문에 결혼하면서 만들어 입었던 한복 말고는 맞는 옷이 없어서, 한복 치마를 걸친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다가 친정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가끔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날 엄마 몸에 맞는 옷이 없었던 일을 떠올린다.
엄마는 더 빈번해지는 피해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완전히 주저앉았다. 핑계는 계속 바뀌었다. 아이들이 사춘기라서, 대학에 가야 하니까, 결혼은 해야 하니까. 지금 엄마는 나와 오빠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늙고 병든 자신을 맡길 수 없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평생 겪을 리 없다고 믿었던 일을 모조리 겪고 있다. 지금 위치, 시공간, 내가 살고 일하는 장소, 자주 오가는 길에 관한 감각이 종종 흐릿해진다. 체감하는 나이는 열두 살쯤이고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옛날 집, 엄마가 모욕과 고통을 견딤으로써 힘겹게 유지된 그 울타리에 갇혔던 시절로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빨려 들어간다. 그곳에서 나는 무기력한 방관자이자 공범이다.
전화를 끊으며 엄마가 내구성이라곤 없이 허약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형태만 유지하던 허술한 울타리는 일찌감치 무너졌을 것이고 우리는 모두 흩어졌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거의 기적처럼 40년을 넘게 버텼지만 엄마 한 사람이 폭력과 멸시를 감당하며 유지한 이 가정은 이제 해체된다. 이런 가정은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들끓었던 감정과 흥분이 가라앉고 한층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현실만 아프게 남아 있었다. 현실은 꺼져가는 담뱃불처럼 힘이 없지만 손에 잡으면 따뜻했던, 그래서 나를 웃게 했던 내 삶의 유일한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아주 또렷하게 알려주었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