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작아 늘 학급번호 1번 혹은 2번을 담당하고, 성적 또한 딱히 특출 나지도 형편없지도 않았던 평범한 학창 시절. 나에게도 남들에 비해 유독 반짝거리는 특별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꿈 주머니'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다.
"응? 꿈이 없다고오?!"
딱히 되고 싶은 것이 없다는 친구들의 말에 놀라 눈이 휘둥레질만큼 내 눈에 비친 세상은 재미난 일, 도전해보고 싶은 일들이 그득그득했다.
주말에도 거실 식탁에 나와 원고지에 글을 써 내려가던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글을 쓰는 사람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던 어린 날의 나는 '신문기자'를 시작으로 '방송작가', '방송 PD', '아나운서', '광고제작자' 그리고 '마케터'에 이르기까지 나의 마음을 동하게 했던 모든 직업들을 꿈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꿈 부자'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일단 대학만 가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의 그 '대학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스무 살의 나는 그간 커다랗게 부푼 꿈 주머니를 열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펼쳐놓기 시작했다. '음... 뭐부터 하지?' 고민하다 '그냥 되는대로 다 해보지 뭐!'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땐, 이미 잠자는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열정과 체력이 넘쳐나던 팔팔한 이십 대였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면서도 기특한 것은 당시 나는 지원서를 내는 족족 합격 통보를 받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때도 눈에 띄게 반짝이는 특출 난 점은 없었다. 다만, 나는 참으로 성실하고 정성스러운 지원자였다. 면접관이 봤을 때, ‘와, 이렇게 까지 정성을 다해서 지원을 하는데, 한 번쯤은 기회를 줘봐야 하지 않겠어?’ 싶을 만큼 말이다. 여기에 안되면 될 때까지 해보는 끈기와 열정이 더해지니 불가능이란 것은 없었다.
그렇게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은 방송국에서, 꿈의 광고 대행사에서, 커다란 기업의 마케팅팀에서 실제로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을 만났다. 아마추어인 학생이 현업에서 일하는 전문가들과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 다시 생각해도 정말이지 나는 참 운이 좋았다.
대학 생활의 로망도 놓칠쏘냐! 캠퍼스 잔디밭에 둘러앉아 기타 연주에 맞춰 목이 터져라 떼창을 부르던 '음악동아리'에서 청춘을 불태워보기도 하고, 학교가 다르면 어떠랴?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이 모인 '연합 광고 동아리'에 매주 모여 밤새 아이디어를 짜고 세상을 바꾸겠다며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기도 했었다. 여기에 학생의 본분까지 지키느라 얼마나 바쁘던지! 학점과 영어 성적까지 야무지게 챙기며 24시간을 완전하게 쓴 나의 촘촘한 대학 시절이 그렇게 지나갔다.
밤새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경험과 인연을 만든 대학생활은 졸업을 앞둔 나에게도 그럴듯한 이력들을 남겨주었다. 취업을 위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그동안 거쳐왔던 굵직굵직한 이력들을 정렬해 보니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거나, 이과를 가야 한다.'는 한탄 섞인 푸념이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될 만큼 경영대 졸업생인 나의 취업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지금까지 통했던 나의 성실함과 끈기는 냉정하고도 높은 프로의 세계에선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제야 바람이 잔뜩 들어갔던 자신감이 사그라들고 날것의 진짜 나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저는 이미 대학시절에 이 회사에서 이런 경험도 해봤고요. 해외에 나가 저런 경험들도 했봤답니다.'
회사 지원서에 자랑스레 적어놓은 나의 경력들을 읽어 내려가다 마음 한편에 뜨끔함과 씁쓸함이 밀려왔다. 찬찬히 뜯어보면 '허울뿐인 껍데기'처럼 '내실은 텅 빈' 나의 이력들이 눈이 들어와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애써 가려놓았지만 사실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간 이렇게 저렇게 요란하게 벌인 일들은 많았지만 안에 단단하게 쌓아 올린 실력은 한참 부족하다는 걸 말이다. 이 정도면 그럴듯해 보이니 모르겠지? 싶었는데 역시나, 수많은 지원자를 마주하는 기업의 인사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제껏 먹혀왔던 나의 끈기와 성실함만으로는 그 높고 냉정한 프로에 세계에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이후 원하는 회사에 입사에 부모님께 용돈도 드릴 수 있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예전과는 달리 철이 들어 약간은 겸손해진 나는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하고 싶은 일에 무작정 뛰어들어 이것 조금 하고 끝, 저것 조금 하고 끝 하는 식으로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왔는데. 계속 이렇게 쓸고 지나가듯 얕은 경험들로 내 인생을 가득 채워도 되는 걸까?라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즘엔 세상이 많이 변해서 예전처럼 한 우물을 깊게 파는 시대는 아니라고들 한다. 대신, 이 우물, 저 우물을 조금씩 여러 개를 파다 보면 어느 순간 이들이 연결되어 커다란 구덩이가 되고 그렇게 확장된 세계가 인생에 또 다른 기회들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나의 경험들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세계를 만들고 있는 걸까?
지금껏 한 것들은 정말 많은 것 같은데 왜 손에 잡히는 결실은 없는 것 같은지 아쉬울 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 아직 나는 얕은 구덩이를 팔 만큼의 무언가를 해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발만 디뎠다 떼었을 뿐, 후에 남은 발자국은 슬쩍 지나가는 산들바람에도 휩쓸려 나갈 만큼 깊이가 없다고 느껴졌으니까. 그렇게 이십 대부터 나이 마흔을 앞둔 지금까지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발자국만 남기고 살아왔으니, 뒤돌아본 나의 찬란한 이십 대와 삼십 대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 초초해졌다.
마치 다트 게임에서 팔 빠지게 많은 화살을 던지긴 했는데, 그 모두가 과녁에 가닿았다 꼬꾸라진 느낌이랄까? 어느 것 하나 힘줘서 정확히 과녁에 꽂히지 못하고 모두 튕겨져 나와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하나라도 제대로 꽂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는 '불혹' 될 수 없겠어!"
이제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삽십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면서 문득 ‘관성처럼 계속 이렇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아무래도 이번 판은 망했다며 바닥에 수북이 떨어진 화살들을 그저 지나쳐 또 새로운 화살들을 쉴 새 없이 던질 건지. 아니면 지금부터는 심기일전해서 판을 뚫어버릴 정도로 하나만큼은 제대로 던져 볼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불혹’이라 말하는 마흔의 나이에 흔들리지 않는 진짜 어른이 되려면 뭐든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멍-’ 때리며 살다가 ‘안되면 말지’하고 흐지부지하게 끝내버리는 걸 정말 끝낼 때가 온 것이다.
내 중심을 바로 잡고 서서 공부던, 일이건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뭐든지 할 거면 제대로 시작하고 끝맺는 사람. ⅔ 혹은 92%까지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100%를 온전한 힘을 다해 끝내는 완성형 인간이 되어보기로 다짐해 본다.
쓰다 보니 또 괜히 시작만 거창해질까 염려되었던 나는 일단 가볍게 글을 쓰는 것으로 완성형 인생을 위한 한 발을 내디뎌 보기로 했다. 차분히 서재에 앉아 타닥타닥 경쾌한 타자 소리를 내며 나에 대해, 나를 통해 비친 세상에 대한 감상들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스스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완성되고 싶은지에 대한 방향이 보일 테니까.
뭐든 한 번에 열정을 화르르 불태우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버리는 나의 습성 탓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일은 굉장한 도전이 될 테지! 하지만 마흔은 한 달 앞둔 '12월' 내 생일에 그 글들을 엮어 스스로에게 선물한다면 그보다 멋진 선물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완성형 인간이 되고픈 열정가의 바람을 담아 책의 제목은 미리 이렇게 지어 두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마흔.'
삼십 대 중반, '초보 엄마가 된 나'의 마음을 다독이려 비유와 상징을 담은 그림동화책 <엄마 동화>를 출판했었는데, 이번엔 마음속 생각들을 담담하게 풀어낸 에세이 형식의 글들을 쌓아나가 보려고 한다.
아기자기하고 몽글몽글 한 소녀감성 대신 조금은 더 성숙해진 어른의 마음을 담아서. 나의 이 두 번째 책이 세상에 묻혀 사느라 숨겨져 있던 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한 열쇠가 되어주길. 어느새 또 커다란 소망을 품어본다.
▼해당 에세이는 팟캐스트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03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