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습자지' 같은 사람입니다
도대체 MBTI가 뭐길래?!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꼭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으려고 하는 편이다. 모임이 끝난 후 나만의 공간에 들어와 좋아하는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방전된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랄까?!
어느 더운 여름날, 작게 자른 아담하고 달콤한 멜론을 우물우물 씹으며 오래 알고 지낸 언니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서른 후반인 나와 마흔 초반인 언니는 나이가 들면서 에너지가 너무 빨리 닳는다며 각자 어떻게 에너지를 충전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내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격양된 목소리로 언니가 물었다. 아니 확신의 말을 던졌다. "그래, 내가 전부터 느꼈는데, 맞는구나 맞아. 그러니까 너는 내성적인 성격인거지? MBTI로 치면 I에 해당하는 내향인, 맞지?"라고.
그 순간, 왜 인지 정확히 설명할 순 없었지만 오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개인마다 소실된 에너지를 복구하는 비법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나는 그냥 한 단어, '내성적인 아이'로 규정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며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감정적으로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강하게 받았지만, 이성적으로 언니를 설득할 논리가 없었던 탓이다. 나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며 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E냐 I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실 MBTI에서 가장 첫 번째로 구분되는 성격 유형인 외향성(Extraversion)과 내향성(Intraversion) 중에 나는 내향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이 '에너지'를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활동하면서 얻느냐, 개인적으로 조용한 시간을 갖으며 얻느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MBTI에서 규정하는 내향적인 사람의 성격과 나의 행동에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예를 들면, '내향적인 사람은 수줍음이 많아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대중앞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특징들을 갖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점들은 전혀 나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상반되기까지 했다. 나는 혼자 사색하고 글을 쓰는 것은 좋아하지만 호기심이 많아 굉장히 다양한 모임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를 즐겨했다. 광고제작, 마케팅, 음악연주, 방송제작을 위해 다양하고 독특한 사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던 모임에서 아이디어 내기를 두려워하기 보단 오히려 즐기는 편이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극적인 스토리 전개로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자존심이 단단히 상했던 것이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MBTI는 '내향인은 그런건 잘 못하는데'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에게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열정적으로 쌓아 온 나의 크리에이티브함과 열정이 깡그리 부정당하는 느낌이 든 것도 당연했다.
내향인의 바이블 <콰이어트>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부제를 가진 '수잔 케인'의 책 <콰이어트>를 만났다. 내향인의 바이블과 같은 책이라고 추천받아 읽기 시작한 이 책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하고 싶었던 걸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이 책에는 MBTI보다는 입체적으로, 그러나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나를 설명해 줄 무언가가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I는 담아낼 수 없었던 입체적 나
책장을 넘기다 유레카를 외친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책에서 제시하는 한 개념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MBTI에서는 '내향인'이라며 다소 평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을 이 책에서는 좀 더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나는 '고 반응'의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고 반응'이라... 흥미로웠다. 용어가 다소 학술적이라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중요한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였다.
'고 반응' 기질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인 경험이든 부정적인 경험이든 주어진 상황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섬세하고 민감하게 세상과 자극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뺏긴 에너지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채워나간다고 한다. 사색하며 지적으로 비옥한 활동을 많이 하기에 예술가 작가, 과학자 등 크리에이티브한 일들을 잘 해내는 경향이 있으며, 작은 것에도 섬세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공감과 교류에 뛰어난 협력가라고 책은 설명하고 있었다.
'오호라! 이렇게까지 나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책이 있었던가?!' MBTI가 '내향인'으로 규정하면서 후려쳐버린 나의 자랑스러우면서도 상반된 기질을 입체적이고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이 책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가슴을 턱 막고 있던 답답함이 속 시원히 내려갔다.
'나는 습자지 같은 사람입니다.'
<콰이어트>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설명하는 '고 반응' 이론은 워낙 명확해서 이해가 잘 되긴 했지만, 용어 자체가 주는 딱딱한 느낌을 지울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 반응'을 대체 할 나만의 표현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나의 멋진 특성을 부드럽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을. 그렇게 나온 말이 바로 '나는 습자지 같은 사람입니다.'이다. 물이 다가오면 금세 수분을 머금어 버리는 하늘하늘하면서도 유연한 '습자지'는 정말이지 나의 성격을 찰떡같이 설명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것들을 흡수해 자신의 몸을 서서히 물들이고 또 조용히 세상을 물들이는 유연한 습자지'로도 풀어쓸 수 있겠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기에 숨어있는 수줍음쟁이가 아니라 고요히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나타내기에 이보다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정말이지 나는 이 표현이 마음에 꼭 든다. 마음에 확 스며 들어왔달까.
내 안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다
MBTI의 내향인이 담지 못했던, 나를 표현하는 표현을 찾게되어 속이 아주 뻥 뚫린 듯 시원하다. 이 책이 나도 몰랐던 나의 성향을 또렷하게 보여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간 궁금했던 내 안의 몇 가지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스스를 옭아매던 수수께끼의 답을 풀고 나왔달까.
예를 들면, '나는 왜 주변의 조그마한 갈등조차 몹시 버겁게 느끼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주변인들끼리의 갈등조차 몹시 견디기 힘들어하곤 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임에도 말이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아 늘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한때는 그런 자신을 이해해 보겠다며 애꿎게 나의 어린 시절 기억들을 모두 소환해 혹시 있을 결핍들까지 찾아보았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나의 노력이 참 가상하기도 하고 웃프기도 하다. 참 열심히 살았다. 나 자신!)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의 겹핍이 만들어 낸 쓴 뿌리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성향이 습자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란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너무 큰 도움을 준 이 책에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낸다. 아직 MBTI 내향인의 굴레에서 답답해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 책을 함께 나누고 싶다.
▼해당 에세이는 팟캐스트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04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