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영어야! 그동안 너를 오해했어

영어에 대한 기억과 오해들

by 스윗라임

나에겐 '생애 최초의 기억'으로 분류되는 몇 가지의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들은 참으로 강렬한 나머지 오묘한 색으로 둘러싸인 아우라를 뿜어내곤 한다. 그중, 유독 벌건 주황빛을 발하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분명 내 인생 최초의 '당황스러움'을 차지할 것이라 확신할 만큼 참으로 강렬하다.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블러처리가 된 듯 흐릿한 기억 속에서 또렷이 그려지는 건, 그날이 내가 새로운 유치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이었다는 것과, 친구들과 함께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자 그림 카드'를 들고 있는 예쁜 여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독 키가 작아 늘 앞에 앉아있던 나에게 선생님은 '무어라 알 수 없는 질문'을 했지만 눈치 백 단이었던 어린 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 있게 대답을 했더랬다. "사자요!" 그 순간, 반 전체를 비추던 카메라 앵글은 나의 시선으로 바뀐다. 그리고 화면 가득 나를 바라보며 당황스러워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표정을 담아낸다.'도대체 뭐가 잘 못 된 거지? 사자가 아닌가?... 호... 호랑인가?'라는 나의 독백과 함께.


후에야 나는 우리가 그날 영어 수업을 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나에게 영어로 '이 동물의 이름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는 걸, 나 빼고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사자가 영어로 "라이언(Lion)"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80년대 생인 나와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는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ABC를 배우기 시작했었는데 다들 어떻게 그 어린 나이부터 라이언을 알고 있던 걸까?


중요한 건, 당시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던 명문 유치원에 갓 입학한 나에게는 그날이 화끈거리는 당황스러움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된 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벌건 주황빛의 아우라로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영어'란 녀석은 살면서 줄곧 나를 쫓아왔다. 아니지. 정확히는 내가 그의 뒤꽁지를 쫓아다니느라 늘 애가 탔다. 대학 입시를 위해 눈이 시벌개지도록 길고 이상한 단어들을 외우며 전속력을 내다가도, 한창 광고에 빠져 낭만과 꿈에 취해있던 대학시절엔 '토익'따위가 뭐가 중요하냐며 진짜 대학생은 영어 공부가 아닌 삶의 경험을 해야 한다고 친구들과 명동거리에서 '영어 타도'를 외치는 플래시몹을 하기도 했었다.


녹록지 않은 취업의 벽 앞에서 다시 현실을 마주한 채 영어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야 했던 나는 결국 영국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경영학도로 마케팅에 큰 꿈을 꾸고 글로벌 기업의 커리어 우먼으로 일하고 싶었던 나에게 학교에서 마련한 '런던 소재 마케팅 회사, 무급 인턴'은 참으로 있어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삼 개월간의 짧은 인턴기간이 나에게 남긴 건, '유창한 영어실력'이 아닌 '생고생'과 '난생처음 사귀어본 외국 친구들과의 소소한 추억들' 뿐이었지만 괜찮았다. 이력서를 화려하게 장식할 있어 보이는 한 줄의 경력을 얻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얻어낸 한 줄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나는 세계 여러 나라에 지사를 두고 있는 회사에서 본사 마케터로 일하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는 동안 '신제품 론칭 파티', '국가별 광고 제작' 등 업무를 하면서 다양한 국적의 파트너들과 일을 하긴 했지만 웬일인지 영어는 늘 다가가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느껴졌다.


지난 이십여 년간 나의 영어 실력은 꾸준히 향상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왈가닥 유치원 시절부터 성실히 월급을 받는 어른이 된 지금까지 나와 영어와의 거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는 여전히 나 같은 평범한 인간 따위는 가까이할 수 없는 신 같은 존재로 저 멀리 높은 곳에서 벌건 주황빛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일까? 할 줄 아는 말도, 단어도 이렇게 많아졌는데 말이다.


이 아리송한 수수께끼는 나의 사랑, 딸둥이들이 유치원을 다니면서 우연한 계기로 풀리게 됐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는 아이들을 국제 학교 부속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직 만 네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하루종일 영어를 듣고 사용해야 하는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할지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적응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고 적응하는 아이들이었기에 금세 친구를 사귀며 새로운 유치원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즈음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오늘은 무얼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매일의 일상이 공유되는 학급 메일(Daily Email)을 받아 보는 것까지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독해에 강한 한국 사람이니 말이다.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 학부모 면담이나 학교 행사 참석도 크게 어렵진 않았다. 미리 예상되는 질문과 답변을 준비하면 되었으니까!


문제는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들 혹은 아이들의 친구들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의 하원을 기다리는 대기 장소에서 같은 반 친구들의 부모님들을 만나서 일, 이십 분의 짧은 시간 동안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일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고, 다른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거나, 친한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경우에는 몇 시간 동안 함께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미국, 영국처럼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외국인 친구들은 물론이었고, 제2 외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유럽에서 온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나도 모르게 한껏 긴장이 되어 간단한 대화조차 '어버버...' 하기를 반복하곤 했다.




시간과 경험이 약이라고 하던가! 서로의 얼굴이 낯익어가고 어색했던 관계가 친밀해지면서, 특별히 서로의 집에 초대해 한자리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동안 나는 영어를 대단히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어는 그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일 뿐인데, 시험 등 평가를 위한 도구로만 대해온 시절이 길었던 탓인지 말을 할 때면 늘 조심스러웠다. 문법이, 발음이, 사용하는 단어가 어눌하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정작 앞에서 나를 보고 대화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보다 앞서 있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제2 외국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중시했던 건, 언어라는 도구 그 자체가 아니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이었다. 다음에 본인이 말할 문장을 정비하고 단어를 고르느라 내 말을 흘려듣지도 않았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맞장구를 쳐주고 공감해 주었다. 어느 정도 만남에 대한 긴장이 풀리고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그 시간이 참으로 편안하고 귀하게 느껴졌다. 부끄럽지만 거의 난생처음으로 영어를 '소통의 도구'로 쓰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몰랐는데 나 그동안 영어를 사치품처럼 대해왔네. 영어도 결국 언어의 한 종류이고, 언어란 누구나 매일 사용하는 편안한 생필품인데 말이야. 멋져 보일 필요가 없는데 왜 그렇게 거기에 집착했던 걸까? 본질은 소통이었는데.'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기에 소통을 잘하려면 잘 듣고 간결히 말해야 하는데 '그간 나는 보다 나은 미사여구로 예의 있게 말하는데 집중하느라 얼마나 많은 대화를 의미 없이 날려버렸나'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지라 가끔은 또 예전과 같이 머릿속으로 문장 순서를 배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외국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한 템포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속삭이곤 한다.


"멋져 보이려고, 유창해 보이려고, 품격 있게 이야기하려고 애쓰지 말고 오늘 내 앞에 있는 그 사람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고 마음을 나누는 소통을 하고 오자!'


아이들을 낳고 깨달은 것도 성숙해진 것도 정말 많지만, 그중에서 정말 감사한 몇 가지 중 하나는 바로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을 소중하고 귀한 외국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왜 영어를 공부하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진심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순식간에 엄마보다 훨씬 유창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갈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매일 생각한다. '엄마도 너희의 친구가 되어 조금은 느리지만 같이 열심히 노력해 볼게. 유치원 수준의 영어에서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매일 조금씩 같이 성장할 거야. 언젠가 너희와 세계를 함께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할 날이 올 테니까 말이야.'


팝스타처럼 저 멀리서 밝게 빛나서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영어가 이제야 조금은 옆집 동생처럼 언니처럼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영어에 대한 기억이 점수와 판단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나눈 기분 좋은 추억으로 가득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본다.






▼해당 에세이는 팟캐스트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14111[일상 에세이 13화] 미안, 영어야! 그동안 너를 오해했어매주 화요일에는 일상에서 발견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쓰고 나눕니다. 오디오에 담긴 에세이 본문은 브런치글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일상 에세이 13화] 미안, 영어야! 그동안 너를 오해했www.podbbang.com

▼해당 에세이는 팟캐스트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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