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꼬박 이년 반동안 방문하지 못한 한국을 가는 날이었다. 비행기로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을 만큼 정말 가까운 베이징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오랜만에 서울을 갈 수 있게 된 건 드디어 길고 길었던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아니할 수 없었던 시설 격리가 없어진 후에야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는지, 비행기 탑승 후 한 시간이 지날 무렵 들려온 기장님의 한마디 'Cabin crew, prepare for landing(승무원, 착륙준비하세요)'이라는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쏟아버렸다. 오랜만에 만나 그간 훌쩍 커버린 손녀들을 번쩍 안아 올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훔쳤다.
오랜만에 온 한국은 활기가 넘쳤고 또 새로웠다. 그간 어찌나 새롭고 기발한 공연들과 멋진 공간들이 많이 생겼는지! 코로나 때문에, 또 외국에 사느라 못했던 다양한 경험들을 이번에는 아이들이 모두 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앞서 마음이 바빴다.
'가만있자. 어린이 뮤지컬을 한번 보여줄까? '알사탕'이라는 그림책으로 만든 뮤지컬이 유명하구나. 얼른 예매해야지!'
집 안 서재를 가득 채운 책들은 거의 다 전집 형식의 책들이었는데, 오로지 뮤지컬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예습 겸 '알사탕'이라는 그림책을 구매했다. 그 책은 전집의 그림책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고 또 특별해 보였다. 보통의 그림책들은 '친구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요' 혹은 '장난감을 잘 치워야 해요'와 같이 교육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단행본으로 된 이 책은 영화와 소설처럼 서사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드커버를 넘기면 펼쳐지는 40페이지 남짓의 짧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하나의 드라마를 본 듯해 기분이 묘했다. 아이들 그림책에 관심이 생기고 마음이 가는 나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처음이라 좀 낯설고 어색했다고나 할까?
그림책 '알사탕' 삽화 중 일부 (저자:백희나)
본래 감동이 있는 드라마와 음악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좋아하는 뮤지컬이라면 가격이 비싸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나였지만, 아이들을 위해 찾은 뮤지컬 극장에 들어서면서는 어떠한 감흥도 기대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존에 보아왔던 책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저' 아이들이 한국에 왔을 때 뮤지컬이라는 장르도 경험해 보고 가야지.'라는 마음으로 예매한 공연이었다. 그렇기에 공연의 원작이 되는 책이 그렇게 유명한 지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상하다, 나 왜 울지?'
옆자리 간격이 좁은 소극장이었다. 시댁 부모님과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보고 있는데 예고 없이 눈에서 '뚝' 떨어지는 눈물이라니. '뚝'으로 시작한 눈물은 점차 '뚝뚝, 뚝뚝뚝'으로 그 강도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아, 나 뮤지컬 너무 좋아하는데 오랜만에 공연을 보니까 감수성이 폭발했나?'라고 생각하다가도 배우가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음악이 나오기만 하면 우는 내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다행이었던 건 한 시간 남짓한 짧은 뮤지컬을 보는 동안 몰래 눈물을 훔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옆에서 같이 울고 있는 엄마들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아름답다. 이야기도, 음악도, 무대연출도 모든 게 다. 너무 좋아!'
그날이었다. 내가 그림책과 사랑이 빠진 것은!
아이들을 위해 봤던 공연에서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발견한 날이었다. 이후, '알사탕'의 저자인 백희나 작가님의 책을 모두 구입해 읽기 시작한 것으로 그림책에 대한 나의 열정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그림책의 원조격인 영국과 미국의 원서들을 공부하는 강의를 찾아 수업을 듣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덕분에 짧은 글과 그림만으로 구성된 간단해 보이는 얇은 그림책 안에 이토록 깊고, 다채로운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걸, 수많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나며 감탄하고 또 감탄할 수 있었다. 흔히들 동화책과 그림책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데, 동화책은 그림이 글의 부연 설명을 하는데 그친다면,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함께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글과 그림을 함께 보면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게 된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느끼는 감상과 감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글이 없지만 그림만으로도 이야기가 되는 책들도 무궁무진하니까.
시인들의 시처럼 유명 화가들의 그림에서 처럼 그 안에 담긴 숨겨진 아름다움과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재미와 감동이란! 단순히 아이들의 전유물이라 불리기에는 아까운 그림책들이 너무 많았다. 그림책의 매력을 발견하고 읽어나가는 행복을 맛보면서 든 생각은 그림책은 하나의 예술품이자, 15초의 마법이라 불리는 광고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긴 글을 통해서는 누구나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짧은 글과 그림 안에 오묘하고 신비한 진리와 인생의 철학을 전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림책이라는 세상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경험하며 역경을 헤쳐나간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안전하면서도 값진 경험인지. 게다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루에도 몇 권씩 단숨에 읽고 또 읽을 수 있다니. 그림책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걸, 그리고 세상에는 이토록 아름답고 좋은 그림책이 많다는 걸 이제라도 알게 되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감춰져 있던 미지의 세계의 문을 열고 이제야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는 느낌이다.
평생 관심을 갖지 않았던, 아니 관심의 영역에 들어올 틈이 없었던 그림책의 진가를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되어 너무나도 기쁘다. 앞으로 남은 몇십 년의 인생동안 또 어떤 다양한 그림책들이 나의 삶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그려줄까?
나만의 그림책을 만드는 그날도 한번 꿈꿔보기로 했다. 이미 엄마 동화라는 그림동화책을 독립 출판하긴 했지만, 이번엔 글뿐 아니라 그림도 모두 내 손으로 창착해보고 싶다. 온전히 내가 고민해서 그려내고 스토리를 만들어낸 완전한 그림책 말이다. 미술과는 담쌓은 지 오래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지금 껏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을 텐데, 아직 늦은 건 없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내 손으로 그린 그림과 글을 담아 그림책을 출간하는 그날을 상상해 본다. 생각만으로도 내 인생이 다시 한번 반짝이며 생기를 띄는 듯하다. 마흔을 앞두고 발견한 두근거리는 꿈이라니! 매월 수백만 원의 당첨금이 통장에 입금되는 연금 복권 당첨자들도 이런 기분일까? 매일, 매일을 즐거운 상상과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가득 채우며 인생의 시간들을 풍요롭게 가꿔갈 생각을 하니 정말이지 너무나 든든하고 행복해졌다.
이제 평생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다. 읽고 쓰고 그리다 보면 매일매일이 얼마나 풍족하고 즐거울까? '그림책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 언젠가 책 하드커버에 나의 이름이 적힌 그림책을 꼭 껴안고 함박웃음 지을 그날을 상상하며 오늘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해당 에세이는 팟캐스트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15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