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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라임 Sep 18. 2023

이번에 떨어지면 정말 부서질 것 같아. 그래도 말이야

처참하게 무너진 후, 시작이 망설여질 때 / After the fall

'어른도 그림책을 읽나요? 왜요?'


마흔을 앞두고 요즘 저는 그림책에 빠져 덕질 중입니다. 요즘은 케이팝이 대세라는데, 다 큰 어른이 그림책 덕질 중이라니 의아해서 물으실 수도 있겠어요. 음, 저는 그분을 꼭 붙들고 변명 말고 영업을 하고 싶네요. 그림책이 이렇게 매력 있으니 같이 덕질하자고요.  


흔히들 광고를 15초의 예술이라고 하잖아요. 그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함이 있으니까요. 저에게 있어 어떤 그림책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예술처럼 느껴집니다. 서른 페이지 정도 되는 공간에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림책은 앞뒤를 감싸는 두꺼운 하드커버를 포함하더라도 그 폭이 1cm를 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얇디얇은 폭안에는 '인생에 깨달음을 주는 철학'과 '미술관에 걸릴 만큼 아름다운 그림'들이 가득합니다. 정말 훌륭한 그림책들은 말이에요. 저는 그런 그림책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놀라운 건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숨은 그림 찾기 혹은 보물 찾기처럼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보입니다.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가져와 새롭게 풀어내기도 하고요. 그림 속에 다른 그림책, 명화들을 들여와 새롭게 창조하기도 하죠. 시공간을 초월해 가져온 다채로운 요소들을 여기저기 숨겨놓은 작가들의 그림책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도 있어요.


참 신기하죠? 소설이나 영화, 넷플릭스 시리즈로는 몇 시간을 봐야지만 느낄 수 있는 감동과 생각들을 짧은 그림책을 보는 10분 동안에도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좋은 그림책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다채로운 삶과 서사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시처럼 함축적이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어렵거나 부담스럽지도 않아요. 이토록 친절하고도 다정하니까요. 그러니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림책과 말이에요.


이미 덕질에 빠져버린 저와는 달리 아직 그림책이 낯설기만 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옛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반전의 스토리가 따뜻하게 공존하는 책이거든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즘엔 아마 알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그림책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요.



제목 Title - After fall

저자 Author - Dan Santat

출판사 Publisher - Andersen press

*한국어 번안책 : 떨어질까 봐 무서워 (출판사: 위즈덤 하우스)


영미권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그 친구, 험티 덤티 이야기

혹시 '험티 덤티(Humpty Dumpty)' 이야기를 아시나요? 흔히들 동요나 전래동화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담겨 있다고 하잖아요. 오늘의 주인공 '험티 덤티'도 영미권 나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구전 동화의 주인공이에요. 우리나라로 치면 흥부 놀부에 나오는 흥부처럼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친숙하고 유명한 친구인 셈이지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동요로 접하기도 하고요. 영화 등 새로운 창작물에도 종종 등장해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험티 덤티에 관한 동요와 관련 영화가 궁금하신 분은 제가 이전에 작성한 글을 참고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Humpty Dumpty 이야기)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험티 덤티' 이야기를 기반으로 해요. 높은 담 위에 앉아 있다 추락한 달걀 '험티 덤티'는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데요. 그를 찾아온 왕의 말들도, 군사들도 결국 그를 원래대로 붙일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렇게 깨진 달걀, 험티 덤티는 깨진 그 상태로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깨진 달걀, 그 이후...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그 유명한 원작 이야기를 기반으로 후속 편이 나오게 된 거예요. 바로 "After the fall"이라는 이 책으로요.

Then one day, I fell. (I'm sort of famous for that part.)
Folks called it 'The Great Fall', which sounds a little grand.
It was just an accident.
But it changed my life


세상에! 결론이 나버렸다고 생각한 그 유명한 이야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덧입혀졌다니,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 부서지고 끝나버린 것 같았던 '험티 덤티'의 인생은 이 책을 통해 부활합니다. 멈춘 줄 알았던 그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 거죠.



원작의 결말을 살짝 비틀어 새로 써 내려간 이야기

이야기는 원작의 결론을 살짝 비틀면서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이 고치려고 노력해도 고칠 수 없었던 '험티 덤티'는 기존 결말과는 달리 병원에서 많이 완쾌되어 퇴원하게 돼요. 하지만 또다시 떨어지게 될까 무서워 다시는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지요.

후속 편과 같은 이 책에서는 원작에서 험티 덤티가 높은 담 위에 올라간 이유도 새롭게 조명합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겠다는 욕심을 부리다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좋아하는 새를 가까이 보고 싶어 높이 높이 올라간 것이라고요. 이 지점에서부터 원작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들은 무릎을 탁 치며 '험티 덤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돼요. 이제껏 고집스러운 욕심쟁이로 비쳤던 그는 사실, 새를 사랑하는 로맨티시스트였으니 말이에요. 이렇게 새롭게 쓰인 이야기에서 누명(?)을 벗은 '험티 덤티'는 높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기만 할 뿐, 다시 사다리에 오르지 못합니다. 사고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대신, 사랑하는 새를 잊지 못해 방법을 바꿉니다. 멀리멀리 날아오르는 새에 닿을 수 없다면 직접 새를 만들어보기로 한 거예요. 그렇게 그가 만든 새를 날리며 웃음을 되찾아가는 험티 덤티 앞에 언제나처럼 '사고'는 또다시 일어납니다. 이제는 오를 수 없는 높고 높은 담 위로 자신이 만든 종이 새가 날아가 버렸거든요.   


Unforfunately, accidents happen...
They always do.


산산이 부서졌던 기억, 깨질 듯이 엄습해 오는 두려움

이제 그는 선택해야 합니다. 현실과 타협해 돌아설 것인지, 용기를 내 다시 일어나 볼 것인지요. 담장 너머로 날아가는 종이 새를 보며 그는 생각했을 겁니다. 머리가 쭈삣,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무서웠을 거예요. 그는 한번 떨어져 봤으니까요. 그렇게 한번 처절하게, 산산이 부서져봤으니까요. 또다시 그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이번에는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는 결심합니다. 다시 그 높은 곳을 향해 오르기로요.

부서진 후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어

그렇게 오른 담 위에서 그는 다시 한번 부서집니다. 다만, 이번엔 활짝 웃어요. 산산이 부서지면서요.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난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가 되어 날아오릅니다.

더 이상 그는 깨진 달걀이 아닙니다. 그의 결말은 깨진 달걀이 아니었던 거예요. 사실 그는 아름답게 날아오를 수 있는 새였던 거죠. 책의 말미에서 그는 말합니다. '실패한 달걀'이 아닌 '눈부시게 날아오른 새'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요.

Maybe now you won't think of me as that egg who was famous for falling.
Hopefully, you'll remember me as the egg who got back...
and learned how to fly



부서짐을 딛고 일어나기 vs. 때가 되어 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기

책의 마지막 장을 보다 잠잠히 생각에 잠깁니다.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아픔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선 나만의 이야기가 떠올랐거든요. 그렇게 나의 깨진 달걀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봤어요. 참으로 억척스럽게 성실하게 살아온 제 인생을 돌이켜보니 구석구석에 자리한 저만의 깨진 달걀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중에는 실패를 딛고 날아오른 찬란한 기억도 있습니다. 오랜만에 떠오른 그때의 자신을 토닥여봅니다.


그런데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이런 달걀들도 보입니다. 전에 찾았던 깨진 달걀과는 완전히 다른 달걀들 말이에요. 그건 바로 조급해하지 않고 그저 잠잠히 기다려주었던 나의 실패들입니다. 굳이 지금 당장 극복해 보이겠다고 애쓰지 않고 지켜봐 주었던 그 달걀들 중에도 자연스럽게 알을 깨고 날아오른 것들이 있더라고요. 어릴 때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이, 어른이 되고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레 깨달아지고 알아졌던 그런 것들이요. 이를테면,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 '사람에 대한 이해' 같은 것들 말이죠.

살면서 실패와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릴 때는 무조건 두려움을 딛고 일어나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늘 조급함이 앞서있었거든요. 열심히만 하면 이루지 못할 건 없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요.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성장하면서 깨닫습니다. 막무가내로 극복하겠다며 열정을 불사르지 않아도 되는 것들도 있다는 걸요. 때가 차면 저절로 이루어지고 깨달아지는 것들 말이에요.


험티 덤티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높은 곳을 다시 올라가지 않았더라도, 어쩌면 그는 새가 되어 날아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담에 올라선 그때가 마침 새로 날아오르기로 예정된 시간이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마도 이 책의 작가는 저와 같은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자의 손을 떠나 출간된 책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건 오롯이 독자의 몫이니까요.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죠. 이럴 때는 꼭 이래야 한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살아가렵니다. 매번 퀘스트를 치르듯 레벨 업하며 나아가는 열정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너무 애쓰지 않고 사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으니까요. 이제, 책을 덮으면서 다짐해 봅니다. 이쪽저쪽 유연하게 바라보면서, 다만 애써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분별하기를. 그래서 너무 경직되지 않게 살아가보겠다고 말이죠.


▼해당 에세이는 팟캐스트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0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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