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우리는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혼자 표류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낯선 타인으로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말이에요. 모두가 삼삼오오 화기애애한 그곳에 홀로 걸어 들어가던 그 순간을 기억나시나요?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지는 그 시간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필요한 건 한 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더도 말고 딱 한 가지요. 덩그러니 서있는 나에게 다가와주는 '한 사람'. 그의 '다정한 눈빛', '관심 어린 질문 하나', '함께 걷는 발걸음'은 지금 막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누군가에겐 무엇보다 폭신하고 따뜻한 쿠션이 되어줄 거예요.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나요?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마주했던 처음의 순간마다 내 옆에 다가와 줬던 그 한 사람들이요. 또 생각해 볼까요? 나는 언제 누군가를 위한 '그 한 사람'이었는지요. 먼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그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직도 저와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만날 수많은 처음의 그 순간이 낯설거나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오늘 소개할 책은 '그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끌어당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지 보여주는 사랑스럽고 따뜻한 책이에요. '작은 친절에 관한 이야기, 혼자가 아니야 바네사'를 소개합니다.
제목 Title - 혼자가 아니야 바네사
부제 Sub Title - 작은 친절에 관한 이야기
저자 Author - 케라스코에트
출판사 Publisher - 웅진주니어
이 책은 2016년 미국 텍사스 베일러 대학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그림책이에요. 집단 따돌림을 당한 어느 흑인 학생을 위해 등굣길을 함께 얼어준 300여 명의 학생들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어요. '인종차별'과 '따돌림'처럼 무거운 이야기를 쉽고 따뜻하게 풀어낸 책이랍니다.
글이 없이 그림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인물들의 움직임, 표정, 요소들의 배치만으로도 이야기가 그려지는 것이 참 신기해요. 오히려 글이 없기에 조금 더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전해지는 인물의 감정과 이야기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럼 글 없는 그림책의 스토리를 한번 읽어 내려볼게요.
새로운 학교에 전학 온 베네사의 이야기. 굳이 글로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 그녀의 감정과 생각들이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나요? 수줍고 외로운 그녀의 시간이 얼마나 느리고 무겁게 흘러가는지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아요. 저는 이 책을 수십 번을 읽었는데요. 처음에는 스토리를 생각하며 읽었다면, 이후에 다시 읽을 때는 친구들의 표정하나 주인공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더 잘 살펴보게 돼요. 그 하나하나에 감정이, 더 깊은 이야기가 묻어 나오거든요.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땐 노란 옷을 입은 친구가 바네사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세 번째로 다시 책을 펼쳤을 때였을 거예요 '아, 저 친구가 처음부터 바네사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구나.'라는 걸 알게 된 건요. 여러 번 다시 책을 펼치고 나서야 그녀의 시선이 따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보면 볼수록 새로운 걸 발견하고 느끼는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아이들과 여러 번 함께 다시 보면서 인물들의 감정 읽기, 예상되는 대화문을 유추해 보는 것도 참 재미있더라고요. 글이 없는 책이라 말풍선 모양의 포스트잇에 생각나는 대사를 적어 붙이는 것도 아이가 참 좋아했어요. 그렇게 타인의 마음을 짐작해 보고 글로 적어 붙이며 다시 이야기를 읽어 내려갈 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도 배우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편한 친구와 자연스레 나누는 반가운 인사와 웃음 가득한 대화가 누군가에겐 외로움의 깊이를 더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저는 이 장면을 보다 깨닫게 된 것 같아요. 하굣길, 미소를 머금은 친구들을 뒤로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 바네사를 보다가요. 주머니에 넣은 손때문인지 더욱 단단하게 움추러든 어깨가 안타깝게 느껴져요.
이 책의 묘미 중 하나는 스토리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된 '페이지 구성'과 '시선의 이동'인데요. 그중, 하나를 한번 살펴볼까요? 작가는 모든 것이 낯선 바네사에게 나쁜 말을 쏟아내고 유유히 돌아선 남자아이와 울며 뛰어가는 바네사는 왼쪽 페이지에 배치해 두었어요. 그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놀라고 슬퍼하는 노란 옷을 입은 친구는 오른편에 배치해 두었고요. 분명 연결되는 페이지이지만 페이지가 분할되어 있어서 같이 있는 듯 따로 있는 느낌을 주지요. 가까이에서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친구의 시선을 주인공 바네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페이지 분할을 통해 기가 막히게 표현하지 않았나요?
위에서 아래로, 왼쪽페이지에서 오른쪽 페이지로 노란 옷의 맘씨 좋은 친구의 감정을 함께 느껴가며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잔잔한 재미를 더해줘요. 엄마의 마음으로 이 친구를 바라볼 때는 그 마음이 어찌나 어여쁘고 따뜻한지요. 아이와 함께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어른인 저 혼자 읽을 때도 참 마음이 좋더라고요.
늦은 밤까지 바네사를 생각하던 친구는 아침이 되자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바네사네 집 대문을 두드립니다. 빼꼼히 문을 열고 낯선 친구의 방문에 당황한 듯 서있는 바네사. 그녀에게 친구가 건넨 말이 무었지 너무 알 것 같지 않나요?
"나랑 같이 학교 갈래?"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한 명이 함께 걷기 시작했을 뿐인데, 이후에 만난 또 다른 친구가 인사를 건네고 같이 손을 잡아요. 이제는 둘이 아니라 셋입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미소를 짓네요. 내내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던 바네사가요. 그들이 함께 걸어가는 동안 또 다른 일이 일어날까요?
제가 앞서, 이 책은 페이지의 구성과 인물의 시선 이동이 인상척인 책이라고 했었는데요. 그 보다 더 인상적으로 스토리에 감동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건 '인물들의 이동'인 것 같아요. 위, 아래뿐 아니라 왼쪽과 오른쪽에서, 바네사와 친구들을 향해 다가오는 다른 아이들이 보이시나요? 주인공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데 모여드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감동적이고 웅장한 음악이 들려올 것만 같아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흘러나와 극의 감동을 극대화하는 OST처럼요.
그렇게 바네사와 함께 걸어준 노란 옷의 '그 한 친구' 덕분에 바네사는 수많은 친구들과 함께 웃음 지으며 등교를 합니다. 더 이상 혼자 주머니 속에 두 손을 넣은 채 터덜터덜 걷지 않아도 돼요. 그녀 곁엔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끝없이 연결된 수많은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이 페이지에는 처음엔 눈에 띄지 않았던 다른 아이의 이야기도 하나 숨어있어요. 바로 첫날 잔뜩 움추러든 바네사를 울게 만든 노란 머리 남자 친구인데요. 그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화면 맨 아래 구석에 모두와 함께 걷는 바네사와 친구들을 등지고 벌건 얼굴을 한채 반대로 걷고 있는 친구가 보입니다. 지금 저 친구의 마음은 어떨까요? 자신이 한 일이 떠올라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자신도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속이 상한 것도 같네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가 갖고 있는 이야기들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분명 친구에게 못되게 군 저 아이에게도 여기까지 오게 그만의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 해피엔딩으로 끝난 바네사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책을 덮는 날도 있지만, 한쪽 구석에 벌건 얼굴을 한 친구에게 한참 동안 시선을 둔 채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날도 있었어요. 이렇게 또 아이들과 나눌이야기도, 나 스스로 생각해 보게 되는 질문들도 떠오르게 해주는 참 좋은 책입니다.
작은 친절에 관한 이야기 '혼자가 아니야 바네사.' 어떠셨나요? 우리 모두가 '그랬었었지...'로 말을 흐리는 대신, 지금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는 '그 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면서 오늘의 책 소개를 마칩니다.
▼오디오에 담긴 에세이 본문은 브런치글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04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