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흰 머리카락이지 싶다. 본격 자연치유에 들어서면서 ‘염색 졸업’을 했다 (피부에 화장을 하지 않는 것도 눈에 보이는지 모르겠다). 암수술 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반백의 짧은 머리카락으로 살고 있다. 어떤 거창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친구 따라 강남 가기였다.
2015년 2월 제천의 숲 속 시설에서 한 달 요양할 때였다.
매일 운동하고 자연식 하고 자연치유 실천하며 암 친구 사귀고 정보를 주고받는 게 일상이었다. 폐암, 유방암, 위암, 췌장암, 간암, 자궁암, 난소암, 설암……. 세상의 모든 암환자들이 거기 얼굴로 모여 있었다. 항암제 후유증으로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숱 많은 검은 염색머리인 나는 ‘소수자’였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전날 저녁에 우리 가족이 와서 같이 자고 오후에 그곳을 떠났다. 가족들이 탄 차가 멀어져 가는 걸 바라볼 때, 뒤에 남은 나는 요양환자인 걸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쪽 하늘 노을이 그날따라 쓸쓸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열심히 관리해서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마음을 다잡으며 돌아서니, 역시 가족을 보내고 돌아서는 E가 나를 따라왔다.
"언니, 나 몸이 별로 좋아지는 거 같지 않아. 애들도 걱정이고. 어째야 할까?"
평소 유머감각으로 사람들을 잘 웃기던 E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방까지 따라 들어온 E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버렸다. 밀어버린 민머리가 전등 아래 반들거렸다. 나는 두 팔 벌려 E를 안으며 한 손으로 그의 민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힘든 시간 잘 견뎠어."
나는 숱 많은 내 머리가 문득 민망하게 의식됐다. 암 수술만 하고 자연치유로 들어선 나는 E 앞에서 전혀 암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내 몸은 기운을 찾던 때라, 곁을 주는 E가 고맙게 느껴졌다. 항암치료의 후유증에 합병증, 또 항암치료, 기약할 수 없는 일상 복귀, 그게 객관적인 E의 상태였다. 나는 그를 안아주는 거 말고 함께 할 게 없었다.
나도 머리 싹 밀어버릴까? 나만 머리숱 많은 게 싫었거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이 내 입에서 불쑥 나왔다.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E가 망설임 없이 반응했다. “꺅~ 좋아! 콜!” 개구쟁이들처럼 급 생기발랄해진 우리는 바로 이발 담당 직원을 불렀다. 내 머리에 이발기가 닿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순식간에 검은 머리카락은 바닥에 쌓이고 희끗희끗한 민머리가 드러났다.
"나무 관세음보살~~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신지요?"
"예, 항암사에서 왔습니다만……."
머리카락 없는 암 친구들끼리 하는 우스개였다. 그 시원섭섭하고도 까슬까슬한 민머리의 느낌. 제천에서 함께한 수많은 민머리 ‘암 친구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그 역사적인 민머리를 나는 기념사진으로 남겼다.
머리를 밀고 덤으로 나는 알게 됐다. 머리카락 없는 내 머리통이 나름 봐 줄만 하다는 것을. 그날 이후 회색 머리로 살며 얻은 건 또 있다. “염색 좀 하지?" "너무 없어보이잖아." "염색하면 더 젊어 보일 텐데…….” 사람들의 '아낌없는'조언이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선택은 과연 내 것인가, 이런 거창한 삶의 통찰도 있었다.
아주 가끔 나는 그때의 시원한 민머리의 추억에 잠긴다. 암친들과 민머리를 쓰다듬던 그 끈적한 유머도 떠오른다. 두건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스님 흉내를 내던 E가 생각난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머리를 싹 밀어버린 그 충동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E와의 우정인지, 암친 연대였는지, 또는 자유의 광란인지, 곧 폭발할 분노의 암시였는지…….
우리가 같이 민머리가 된 몇 주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직장에 사표를 냈고 자연치유의 길로 한 걸음 더 내딛게 됐다. 반면 몇 달 후, E는 상태가 나빠져 안산 인근 시에 입원했다. 내가 E를 문병하고 기운 없이 누워있는 민머리에 입 맞추고 온 며칠 후, E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