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에 종양이 확실해 보이네요
2014년 봄은 내가 길 잃은 계절이었다.
나는 재취업에 '성공한' 중년 아줌마였다. 낮은 급여 열악한 처우면 어떤가. 어차피 평생 무급으로 해온 게 돌봄 노동 아니던가. 월급을 받으니 더 '봉사 정신'으로 일했다. 돌봄 대상자들, 어르신과 장애인, 가는 곳마다 그 누구와도 나는 잘 지냈다.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있었지만 8년 일해도 월급은 150만 원 언저리였다. 인근 시 '통합사례관리사'로 옮겨 180만 원 받고 2년 더 다녔다.
3월에 실업급여 수급을 시작하자마자 면접 연락이 왔다. 기간제로 시작하되 '무기계약직' 전환 약속이 있어 포기할 수 없었다. 3월 5일, 면접 대기 중에 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면접 끝나고 대구행 기차를 탔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다. 새벽 1시가 넘어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영안실에 누워계신 아버지가 잠시 부러울 정도로 내 몸이 파김치였다.
아버지의 장례 기간, 허리가 아파 어떤 자세에도 버티기 어려웠다. 잠을 잘 수 없었다. 평소 입맛 하나 자랑하는 나였는데 새 모이만큼 먹기도 힘들었다. 체력이 달렸다. 병원부터 가야겠다 다짐하며 안산으로 돌아온 날 또 면접 약속이 잡혔다. 그리고 취업이 돼 버렸다(그렇게 실업급여 기회가 날아갔고, 11개월 만에 암수술로 퇴사하면서 조기 재취업 수당도 날아갔다).
2014년 4월 16일, 새 직장 출근 3주 차 수요일이었다. 컴퓨터 모니터에 침몰하는 세월호가 띄워진 날이었다. ‘전원 구조’가 오보인 줄도 모르고 전 직원이 일을 멈추고 환호했다. 우리 막내가 세월호 아이들과 같은 학년이었다. 그날 이후, 검은 현수막 사이를 걷는 출퇴근 길이면 다리가 후들거리곤 했다.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있을 수 없는 참사였다. 무얼 해야 하나 나는 날마다 마음이 심란했다.
그 봄에 딸의 고등학교 친구가 급성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집에 놀러 오고 내게 수십 통 편지를 쓰며 친하게 지낸 아이였다. 차가운 아이 몸을 확인하고 그 엄마를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젊은 대학생이 다 뭐고 생명은 뭐란 말인가.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났다. 학교 건물을 봐도, 아줌마들을 봐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막내를 봐도 불쑥 눈물이 났다. 입맛이 없고 체중이 줄고 허리는 계속 아팠다.
2014년 6월 19일 오전, 나는 복부초음파 검사를 받으며 깜빡깜빡 졸고 있었다. 이 몸으론 여름 더위를 견딜 자신이 없어 검진을 결정한 것이었다. 몸을 맡기고 쉬는 시간이었다. 의사가 내 휴식을 방해하며 자꾸 말을 걸고 뭔가 설명했다.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자는 내게 의사가 쐐기를 박아 말했다.
간 해부도를 보는데 피식 웃을 뻔했다. 그 심각한 상황에 왜 쇠고기 돼지고기 부위명 그림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S1은 등심, S4는 안심, S7은 목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