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벌 김화숙 Feb 15. 2024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어리고 불안한 나를 돕는 천사가 어디에나 있었다


“진짜 폴란드 신사는 택시가 3대 필요하지만 저는 한 대네요. 먼저 타시죠.”    


바르샤바 역에서 택시를 타며 마렉이 폴란드 신사 우스개를 했다. 빈에서부터 거의 12시간을 기차를 함께 타고 온 우리였다. 이 폴란드 남자는 지치지 않고 유쾌한데 나는 쓰러져 눕고 싶을만치 상태가 안 좋았다. 더위와 멀미를 견디려 기차 복도를 수없이 드나들며 겨우 도착했건만 너무 힘들었다. 낯선 남자의 친절을 의심하고 거절할 것인가, 계산할 때가 아니었다. 폴란드말을 모르는 나는 그의 유창한 독일어도 고마웠다.


“한 대는 지팡이를 위해, 한 대는 모자를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한 대는 신사를 위해서죠.”          

정말 그럴 것처럼 들렸다. 아담한 키에 배가 살짝 나온 그는 점퍼 차림이었다. 철도에 종사한다는 그는 출장에서 돌아가는 길, 지팡이나 모자 없이도 그의 신사다움은 충분히 빛나고 있었다. 환대하는 폴란드 문화를 생각할 때 이 지친 여행자를 그는 모른척 할 수 없었으리라. 그는 내가 묵을 유스호스텔까지 나를 안내하고 자기 번호를 주고 다음 날 아침에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는 약속을 지켜 나를 도왔고 나는 그의 어머니가 해 주는 폴란드 가정식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렉은 1996년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벗으로 지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니 바야흐로 구공산권 선교시대 90년대였다. 공산주의를 '이긴' 우월감에 도취된 기독교 단체마다 교회마다 러시아와 구소련 기도로 열병을 앓았다. 나를 갑자기 바르샤바에 가게 한 것도 바로 그 광풍이었다. ‘자비량(自備糧)’, 스스로 벌며 선교한다는 단체라 모든 게 쉬웠을 것이다. 유학생 신분이 가장 많이 나갔지만 우리같은 어정쩡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책 없이 가라면 가는 부류였다.


1991년 9월 우리의 폴란드 첫 미션은 제2의 도시 우치(ŁÓDŹ)에서의 어학공부였다. 외국인을 위한 어학학교가 거기만 있었다. 1년 등록금은 1인 3,500달러, 두 사람 생활비까지 현금 1만 달러는 준비해 와야 했다. 우리는 월급받는 선교사가 아니었다. 내가 빈으로 갈 때도 그랬듯 재원은 양가부모 주머니였다. 자고 나면 환율이 달라지던 폴란드에서, 세계 선교 꽃놀이에 도낏자루가 썩고 있었을 것이다.    


견우직녀처럼 우리는 7개월 만에 우치에서 상봉했다. 내일도 알 수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우리에겐 서로가 있었다. 기숙사 룸메이트, 공부친구, 선교동역자. 낯선 나라 낯선 문화에서 우리만의 신혼이자 연애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앞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지 못했다. 한 남자를 사랑하기로 한 여자와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한 남자에게, 오직 ‘믿음’만 있었다.    

 

글쓰기로 그때의 나를 꼭 안아주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줄 수 있었다.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리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라고 노래할 수 있었다. 편지마다 어리고 젊은 내가 있었고 나를 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렉, 자비량 선교사들, 양가 부모님의 수고가 다시 보였다.     

그때 그분들보다 나이가 많아지고 만 이제야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어리고 불안한 나를 돕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또 부끄러움은 나의 몫.     




1) 1991년 7월 14일 빈에서


이곳은 30도 안팎의 더위가 계속됩니다. 심심하면 뿌리던 비도 꽤 오랫동안 안 와, 사람들은 모두 벗고 다닙니다. C께는 그렇게 썼어요. 제가 먼저 폴란드 가면 방은, 혼자 살 방을, 아니면 둘이 살 방을 구해야 하는지? 개척 역사로 시작한다면 다니엘 목자님이 파송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한 번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확신 있게, 가을에 오신다고 말할 때마다, 저를 안심시키려는 소리처럼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현실에 부딪칠 때마다, 믿음 없고 어린 제 속사람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덕에서 전화가 왔더군요. 어머니 왈,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편하게 있었는데, 자꾸 궁금하고 연락해 보고 싶은 게, 혹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니냐고요. 우리 얘길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자세한 건 편지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밀양도 생신 때 이후 연락 안 했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6월에 면접한 데서 일하러 오라 연락왔지 뭐예요. 6살 3살 두 아이 돌보는 아르바이트였죠. 단순노동 60실링인 거 알지만, 면접 때, 내가 좋은 영향 줄 게 확실하니 80실링 달라고 했어요. 여러 일 안 하고 싶다고. 이제 다시 돈 들고 불안정한 폴란드로 우릴 보내시는 하나님이 야속하단 생각이 조금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죠?     


지금 제 수중에 5,000실링 정도 있습니다. 이달 생활비랑 방세는 냈고요. 국제 수양회 대비해서 돈을 벌까 했지만, 날씨도 덥고, 기운도 없고, 맘도 안 내켜요. 어학 친구 아그녜시카가 녹음해 준 테이프로 폴란드어 발음 겨우 배우고 있습니다.       


   

2) 1991년 8월 3일 빈에서     


지난 7월 19-31일까지의 독일선교여행을 짧게 보고하겠습니다.      

7월 19일(금) 슈투트가르트 착. F선교사 댁에 묵음. 소감 쓰며 폴란드 선교에 대한 새 마음. 23일 슈투트가르트 성과 시내 구경. G선교사님 섬김 받고 독일 학생들과 사귀고 놂.

7월 24일(수) 보훔도착. H선교사님 댁 묵음. 창세기 15장 성경 공부. 오직 믿음 강조하면서도 저를 어떻게 하기보단 폴란드에 대해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더군요.

7월 25일(목) 쾰른 도착. I선교사님 댁에서 묵음. 독어로 2쪽 소감 준비해서 주일발표함.

7월 30일(화) 독일 각 지구 학생 소감발표 들음. 밤에 J와 아헨으로.

7월31일(수) 아헨 발. 다음날 0시 반 빈 도착.     

     

저는 유럽 본부나 누군가가 폴란드 선교를 주선하는 줄 알았습니다. 의존적인 마음을 부인하고 I를 찾아갔습니다. C와 H의 방향에 나는 따르는 것뿐이라 발뺌하고 싶었는데, 결국 내 믿음과 결단이 중요한 거였습니다. H는 우리가 지게 될 경제적 부담을 말하며 아주 강력하게 일자리 먼저 뚫으라 제안했습니다. I는 먼저 어학 하며 가능성을 찾아보는 게 순서라고도 했고요. 고생할 각오하란 소리가 많더군요.     



3) 1991년 8월 15일 베를린에서          


저는 현재, 베를린에서 도르트문트로 가는 기차 안에 있습니다. 폴란드에서 한 주를 보낸 후 베를린 들렀다가, 이제 네덜란드 국제수양회로 가는 길이죠. 월요일 저녁 루블린을 떠났고, 바르샤바에서 밤 11시 15분 발 기차를 탔습니다. 밤에는 처음이라 무서웠습니다. 혼자 다니는 사람은 저밖에 안 보였어요. 제가 탄 칸(8인용)에는 폴란드 남자 두 명과 저뿐이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과감히 눈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옆 남자가 자리를 비워주길래 가지고 간 침대 덮개로 몸을 싸고 의자에 누워 잤습니다. 건너편에는 폴란드 아저씨가 코를 골았습니다.    

      

화(8월 6일): 밤 9시 반 바르샤바 착. 거의 12시간 기차여행에 지친 나를 같이 타고 온 폴란드 두 신사(독어가 됨)가 택시로 대학 근처 유스호스텔까지 바래줌. 내일 집으로 초대 약속하고 전화번호 주고 돌아감.

수: 아침에 근처 호텔로 옮김. 마렉 집에서 노모가 차려준 폴란드 가정식 식사. 바르샤바 대학 심방. 헤맨 끝에 교수와 통화되고 금요일 만날 약속. 오후 루블린 고시야 통화함.

목: 마렉 함께 우치 어학학교 관련 문의 문교부 들름. 시내 둘러봄.

금: 지쳐서 오전엔 쉬고 오후 2시 교수 만남.

토: 아침 9시 47분 기차 12시 20분 루블린 도착. 고시야 만남.(역에서 기다리고 있었음) 집 가까운데 호텔 잡음. 힘들어서 토하고 밥 못 먹고 잠.

일 : 오순절 교회 예배. 오후 고시야 집으로 식사 초대. 고시야 가족 및 친구들과 교제함.

월(8월 12일): 우체국. 비인 전화. 우치 다시 전화. 루블린 시내 둘러봄. 저녁 6시 반 기차.


땅이 넓고 밭이 많다는 것. 가톨릭 교회. 선반에 물건이 별로 없는 가게. 텅 빈 캠퍼스. 한국의 늦가을 논처럼 끝없는 밀밭, 말이 끄는 추수기구도 보았어요. 가톨릭 나라라 신교나 선교회를 이단시하는 면도 있답니다. 캠퍼스 제자양성의 의욕이 꿈틀대나요?        


  

4) 1991년 8월 22일 빈에서    

      

오늘은 유난히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빈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선뜻 짐이 챙겨지지 않습니다. 폴란드 대사관 다녀왔습니다. 내가 바르샤바 가서 다 해결한 문제들을 대사관은 아직도 회답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직원은 난처하고 슬픈 얼굴을 하고서, 이것이 폴란드니, 하는 일 성공하길 빈다고 하더군요. 저는 폴란드에 더 목자의 심정이 생겼습니다.      

     

D는 폴란드 개척에 쓰임 받게 되어 감사하다며 이곳에서 함께 헌금한 돈에서 1,500실링을 주네요. 택시 아르바이트가 무척 피곤해 보입니다. 비행기의 반값인 기차로 갈 거 같아요. 다른 데보다 1,000실링 정도 싼 게 있긴 한데, 짐 부치는 것까지 줄이면 이곳 월세 정도 금액이거든요. 내일 더 알아보고, 침대차로 1등 칸 좋게 갈 수 있으면 예약할까 합니다.     


생각건대, 당신 출국 전에 받는 마지막 편지가 되겠습니다. 폴란드에서는 공적인 편지만 부치겠습니다. 아, 행복해요. 더 힘든 나라, 더 오래 걸리는 나라에서, 편지 기다릴 일은 없을 테니까요. 욕심을 부린다면, 겨울이 무서워서, 툭툭한 바지와 치마 하나씩 정도? 영덕 어머니뿐이겠죠. 혹시 어머니가 물으면, 말하세요. 당신의 드보라


이전 07화 빈(Wien)이 어쩌구 베를린(Berlin)이 저쩌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