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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Feb 20. 2024

중고 세탁기와 사모 선서

결국 멈춰서 버린 중고세탁기가 내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가족을 태운 차가 김포공항을 출발해 서울 거리를 달렸다. 번쩍이는 큰 차들이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들쭉날쭉한 건물에 거대한 간판들이 여기가 한국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낯선 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머리 염색이 유행인 것 같았다. 보이는 여성들마다 긴 생머리에 거무스름한 립스틱을 바르고 굽 높은 신발에 통 넓은 바지 차림이었다. 그런 게 유행이란다. 1996년 4월이었다.

  

같은 머리 모양 같은 디자인의 옷이 너무 많았다. 과장하자면 패션이 다 똑같아 보였다. 떠나기 전에도 유행이 있었을 텐데 ―겨우 6년 만인데―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사는 이상한 나라에 갑자기 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한국에 다시 선교사로 온 거야. 한국을 모르는 거다.”

“폴란드는 잊자. 이곳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를 위해 준비된 집에 도착했다. 방 2개 좁은 전셋집은 1,2층이 상가인 다가구 건물 3층에 있었다. 아이들 손을 이끌어 올라가니 복도를 사이에 두고 작은 문이 다닥다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로 부엌이고 왼쪽엔 화장실, 정면으로 방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자그마한 싱크대와 작은 냉장고, 그리고 4인용 식탁만으로도 부엌이 꽉 찼다. 화장실엔 중고 세탁기가 놓였고 세면대 없이 바닥에 쪼그려 씻는 구조였다.

     

폴란드에서 살던 넓은 집이 생각나서 한숨이 나오고 눈물이 나려 했다.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기대하고 여기 왔을까, 아는 게 없었다. 해 질 녘이 되자 큰놈이 집에 가자고 졸랐다. 둘째도 자기들 놀던 방에서 놀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을 달래며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멈춰버린 중고 세탁기   

  

전임 사역자의 사모로서 나는 서울로 사모모임에 가야 했다. 안산 생활 적응할 동안은 서울의 내 모교 지부로 갔고 나중에는 선교 본부로 갔다. 매주 설교문에 근거한 소감을 써서 발표하고 신앙과 생활의 교제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폴란드에선 우리가정 중심이었다면 이젠 20여명 공동체동체의 엄마요 주부역할이 내게 더해졌다. 정신없는 안산 생활이 한 달이나 지났을까, 세탁기가 멈춰서 버렸다. 처음 볼 때부터 중고라 마음이 불안하더라니. 그 주 사모모임에 갈 때 고장난 세탁기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한 주간은 고장난 세탁기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자취생활도 아니고 애 둘 있는 가정에 어떻게 중고 세탁기를 준비했을까,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멈춰서 버린 중고세탁기가 내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나그네로, 폴란드를 떠나 안산으로 온 게 잘한 일인지, 망가질 세탁기인지,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하실지, 회의와 번민이 몰려왔습니다. 한국 온 후로 집안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 없는 다니엘 목자님에 대한 불평불만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제게도 무관심하고 오직 하나님 일에만 몰입하는 모습이 낯설고 저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믿음 없고 감사할 줄 모르는 제 내면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이런 식이었다. 다 버리고 떠났다가 어느날 갑자기 또 버리고 되돌아오니 힘들다는 하소연이었을 것이다. 그럴만하다 고생한다 위로받고 싶었을 것이다. 힘들었지만 자비량 선교사로서 자유롭게 살다가 지금 얼마나 갇힌 느낌인지, 경제적으로 얼마나 답답한지, 공감받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멈춰버린 중고 세탁기는 딱 안산에 멈춰버린 내 꼬라지를 닮아 보일만 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 소감을 들은 리더 사모J는 별 말이 없었다. 아니 그의 말에 내 마음이 더 외로워졌을 것이다.      


“안산으로 오는 믿음의 결단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 주실 것이다. 가난하게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인내를 배우라.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면 풍성한 열매가 있을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주님의 종'과 결혼한 사모는 남편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말씀의 종을 위해 기도하는 게 사모의 제 1 사명이고 자기 십자가다…  "

    

이런 요지였을 것이다. 세탁기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부실한 중고품을 사도록 해서 미안하다거나 돈이 없어서 그랬다거나, 마음에 없는 사과라도 들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더도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세탁기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날 돌아와 가진 돈을 털어 현금 주고 새 세탁기를 샀다. 중고 수리해가며 속을 끓이고 살 때가 아니었으니까.





사모 선서     


안산에서 두 번째 새해 1998년에 나는 셋째를 낳았다. 아기가 100일을 지난 후 나는 선교 본부 사모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단체에서 월급받아 생활하는, 각 지부의 담임 목사들의 아내 모임이라 설명하면 되겠다. 나처럼 새롭게 사모모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치는 통과의례가 있었다. 전국 사모모임에서 하는 소감 발표와 사모선서였다.      


따스한 봄날이었다. 마치 100명의 시어머니를 모시듯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가장 연장자 사모 그룹이 맨 앞쪽에 앉아 있고, 연령 순으로 뒤로 갈수록 젊은 사모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 6명의 사모들이 차례로 앞에 서서 소감을 발표했다. 구원과 부르심에 대해, 사모로서의 소명과 자세가 어떠한지 고백하는 글이었다. 이어서 오른손을 들고 선서문을 소리 내어 읽고 서명해서 리더 사모에게 제출하는 식이었다.


신입 사모들은 대부분 나처럼 60년대생이고 가장 젊은 사람이 1974년생이었다. 그들이 성경에서 뽑은 요절을 옮겨 적어 본다.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잘 보여주는 요절들이었다. 내 순서는 두번째였다.

*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마가복음 1장 45절)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장 1절)

*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창세기 24장 59,60절)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장 2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장 5절)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마가복음 10장 45)     


아, 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나는 남편을 순종하고 동역하겠노라 사모선서를 했다. 우리 관계는 '주의 종'과 '그의 배필' 이라는 질서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내가 했던 선서문도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선    서     


본인은 00선교회 스탭 목자 사모로 부르심 받은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지금까지 성경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덧입고 캠퍼스 복음역사와 세계선교 역사에 헌신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산소망을 더욱 굳게 붙잡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정다니엘 목자님을 기도로 동역하며 겸손히 순종하여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역사에 충성할 것을 선서합니다.     

아울러 선배 사모님들로부터 겸손히 배우며, 성령의 그릇을 이루기에 힘쓸 것을 하나님과 동료 사모님들 앞에 선서하는 바입니다.

              1998년 4월   Staff  사모    정 드보라

                                


  

비교하며 먹는 맛으로 어느 멋있는 남자의 결혼서약문도 옮겨 본다. 1851년 3월 6일, 존 스튜어트 밀이 헤리엇 테일러와 결혼하며 했던 서약이다. 무려 170년도 더 전에 이런 삶을 산 사람들이 있었건만 21세기에도 아직 순종 타령으로 성별위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를 사는 걸까.



결 혼 서 약     


그녀의 동의를 얻어 한 없이 기쁜 나는, 나의 생애에서 알았던 유일한 여인과 결혼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것, 즉 그 상태로 그녀와 들어간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기존의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결혼관계의 모든 성격을 그녀와 나는 우리의 양심을 걸고 완벽하게 거부한다.     

기존의 법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계약된 쌍방 중 일방에게 타방의 행동의 자유와 재산권과 인격을 그녀의 소망과 의지에 무관하게 제어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증스러운 권리를 법적으로 제거시킬 수 있는 수단을 현재로서는 가지고 있질 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결혼법에 대한 정식적 항의를 문서화시켜 남겨둘 의무를 느낀다. 이것은 이러한 권리가 부여되는 한에 있어서는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도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신성한 맹서이다.     

테일러부인과 나 사이에서 성립하는 결혼의 제제에 나는 다음의 선언이 나의 의지와 의도에 적합하며 우리 둘 사이의 계약의 조건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과 그녀에게 속하고 앞으로 속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의 처분의 자유와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나와 동등하게 지니며 결혼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과도 동일한 모든 개체로서의 권리를 지닌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결혼이라는 사건의 덕택으로 얻어진다고 생각되는 모든 권리의 허울을 완전히 부정하고 포기한다.     

1851년 3월 6일 존 스튜어트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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