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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Feb 19. 2024

독립은 멀어지는가, 바르샤바를 떠나 다시 한국으로

나는 다 모른다, 1996년 4월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녜뽀들레그워오시치(Niepodległość)”     


폴란드어로 ‘독립’이란 말이다. 폴란드어의 독특한 발음과 철자 조합이 돋보이는 이 단어는 바르샤바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대로(Aleja) 이름이기도 다. 2차 대전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도시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거리 '독립로'는  바르샤바 마지막 1년 우리집 주소였다. 거기 끝내 부서지지 않고 100년을 살아남은 건물 6층에 우리 가족이 살았다. 방 세 개, 월세 650달러, 성경 공부와 교제를 위한 독립 공간이 있는 멋진 집이었다.     

 

1996년은 폴란드에서 맞은 다섯 번째 새해였다. 93년 첫 직장에서 덕이 500달러로 시작했을 때 폴란드 직원들은 200달러 받았다. 월급은 계속 올라 1,500달러까지 왔다. 폴란드어를 하며 바르샤바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덕은 한국인 사업가들의 러브콜 대상이 되었다. 현지 상황에도 밝아 덕은 새해엔 독립해서 사업을 할까 구상할 정도였다. 우리는 폴란드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 가까운 폴란드 벗들과 이웃이 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선교 사역이었다. 덕이 출근하고 나면 나는 두 아이 엄마로 하루해가 저물었다. 폴란드 대학생 선교를 위해 왔건만 가시적인 결과는 고사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 만 3세가 된 큰아이라도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었지만 울어대는 통에 사흘 만에 포기해야 했다. 나는 언제까지 아이 엄마로만 묶여 살아야 할까, 답답해지곤 했다. 새벽에 깨어 기도하며 눈물을 쏟곤 했다.

 

“명색이 선교사로 왔는데 이게 뭡니까? 먹고살고 애만 키우면 되나요? 그럴 거면 왜 굳이 바르샤바입니까. 이게 무슨 선교입니까. 이러려고 여기까지 보냈나요? 애들도 주님의 양이잖아요. 애들한테 엄마가 필요한데 저는 어찌해야 하나요. 폴란드 양들은 어떻게 하나요. 제발 길을 보여주세요. 저희를 쓰신다는 걸 보여주세요. 사람들 눈에 제 얼굴이 예수님으로 보이고 귀에는 예수님 목소리로 들리게 해 주세요. 제가 가르치면 믿게 해 주세요. 그런 학생을 만나게 해 주세요. 이대로는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도와주세요…”     


그렇게 대학생 이자와 라덱을 만났고 해가 바뀌도록 사귐이 이어지고 있었다.  



폴란드를 떠나게 될 줄이야


청천벽력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한국에서 별별 소식이 들려오더니 새해엔 우리를 한국으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파송한 지부의 담임 C가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고 본부의 A가 그의 후임으로 인사이동했다. 말로 옮기기 힘든 불미스러운 소문도 따랐다.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편지가 오고 C는 중국에서 A는 한국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각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강권을 따라 보냄 받았다고 했다.

    

덕이 안산의 담임으로 와 달라는 제안이었다. 선교사 한 가정을 불러들이자니 몇몇 후보가 거론되었을 것이다. 공부 중이거나 학위를 마치고 자리 잡은 사람들은 갑자기 떠날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자비량 선교사가 이런 조건에 맞았을 것이다. 덕이 암스테르담에서 A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폴란드를 떠나는 게 기정사실로 보였다. 나는 눈물 속에 잠 못 드는 밤을 보내야 했다.  


폴란드를 떠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우리 아니었던가. 입덧하며 멀미하며 어학은 뭐 하러 그렇게 사랑하고 열심히 했을까. 두 아이들과 사역 사이에서 자신을 닦달해온 시간은 무엇이었나. 자비량 선교는 도취였을까, 꿈이었을까. 이제 조금씩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동안 쏟은 땀과 눈물이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내가 폴란드를 안 떠날 이유가 못 된다는 점이었다. 애당초 내 뜻으로 선택하고 결정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떠나야 할 이유도 못 떠날 이유도 내겐 없다는 뜻.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는 게 진실에 가까웠을 다. 내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내 것이 아닌 그 무엇. 라면 갔듯 오라면 오는, 그 선택지만 보였다. 그게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말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와 닮은 변명이란 걸 그땐 생각도 못했다.


내 마음의 소리는 그러나 분명히 한국 가기 싫다고 했다. 질척이는 어두운 구덩이로 빠져드는 느낌과 잊고 살던 '사모'로 유턴하리란 예감 때문이었다. 독립은 멀어지는가. 그때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독립로 꽃길만 걸었을까? 우리가 돌아온 이듬해 한국엔 IMF가 닥쳤다. 폴란드에서 실업자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을지 누가 아는가. 1996년 4월의 선택이 무슨 의미였는지, 아직 나는 다 모른다.



   

당시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덕은 A와 팩스와 전화로 소통했다. 팩스는 가고 편지 원본이 남은 덕분에 덕이 A에게 보낸 편지를 좀 볼 수 있었다. 4식구 항공료를 지원받은 게 인상적이다.


1) 1996년 2월 19일 바르샤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1,2)     

12년 만의 만남으로서는 너무도 짧아서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너무 어려운 문제를 얘기하다 보니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목자님으로부터 한국으로 왔으면 하는 처음 연락을 받은 뒤 지난 3주 동안은 저에게 참으로 길고도 막막한 시간이었습니다.


91년 9월 저의 파송소감 제목이 “나의 조국 폴란드”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일평생 폴란드 영혼들의 목자로 살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지난 4년 6개월 동안 크게 보이는 역사는 없어도 부르심에 대한 믿음은 변함없었습니다. 올해는 비전이 충만하게 출발했기에 암스테르담 갈 때만 해도 폴란드에 남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A,K 두 분과의 대화 후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목자님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이 일을 추진하신다고 하셨지요? 저는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폴란드에 남는 것에도 한국에 가는 것에도 깊은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의 기도와 진심을 생각할 때 한국에 가는 것이 제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폴란드로 올 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나의 조국 폴란드”가 다시 제가 떠나야 할 본토 친척 아비 집이 되었습니다. 폴란드에서 영육 간에 이제 안정되고 해 볼 만한 상황입니다. 오늘도 한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이제 한국으로 가는 게 더 걱정되는 점이 많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자비량 선교사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바울의 자비량 목자상을 흠모하고 배우고자 애써왔습니다. 이제 한국에 가면 풀타임스탭 목자상을 배워야 하겠지요? 사랑하는 A목자님, 이제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1996년 2월 23일 바르샤바


이곳에서 어학을 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제2의 도시 ‘우치’(바르샤바에서 자동차나 열차로 2시간)에 있는 우치 대학교 부속 국립 폴란드어 학교. 유일한 1년 정규코스. 매년 9월 시작 이듬해 6월 마침. 월~토, 처음 3개월은 일일 4시간, 이후 끝까지 일일 7시간 수업. 수업료 연 3,500 USD(2-3인 1실 기숙사비 및 의료보험비 포함). 1년 학생비자가 발급되고 교통비 할인됩니다.


* 바르샤바 대학 부속 어학 학교. 10-12월, 1-3월, 4-6월 매 3개월 완성. 매주 2-3회, 1회당 2시간 수업. 3개월 수업료 300 USD, 학생 신분이 아니라 비자나 보험 교통비 혜택 없음. 주로 바르샤바 체류 외국인들이 생활의 불편을 덜기 위해 이용하는 편입니다.

* 일반 사설 학원. 대개 2-3개월 단기 코스. 개인 교수 시간당 10 달러 정도.   

   

이곳 물가는 구공산권 중 가장 셉니다. 여행객들 얘기로 한국과 별 차이 없다고 합니다. 방 1개 아파트가 월세 200-400달러, 50달러 관리비, 50달러 정도의 전기 가스 수도세가 더해집니다. 시내버스 승차권이 0.5달러, 이발비 5달러, 사과 1킬로에 1-2달러, 가장 값싼 학교식당 한 끼가 2-3달러입니다. 제가 그동안 보너스까지 합하여 월 1,500달러 받았는데, 월세 650달러 내고 생활해 보면 매달 빠듯하였습니다.         



  

3) 1996년 3월 7일 바르샤바     


저희는 3월 마지막 주에 봄 성경학교 갖고 새 양들을 얻어 풍성한 일대일 역사를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행을 결정하며 이를 취소하고 기존 두 양을 돕는데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어제는 참으로 기쁜 날이었습니다 Iza 자매님이 요한복음 4장을 공부하고 거듭났습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계속된 말씀공부와 주일예배 통해 마음이 준비되어 왔는데 지난주 요한 3장과 어제 요한 4장 공부한 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딸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키워 주시길 기도합니다. Radek 형제님은 말씀 공부는 계속하면서도 변화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요즘은 제게 수영을 가르치며 교제하고 있습니다.

  

이곳 양들을 생각하면 더 머물고 싶지만, 가야 한다면 속히 가야 하지 않나 합니다. 그래서 조금 앞당겨 4월 중순쯤 예정입니다. 이곳에서 자비량 선교사로 살며 빚진 것도 모은 돈도 없습니다. 제일 싼 비행기 편은 4 식구 합해 편도 2,500달러 정도입니다.    

  

소식지에 있는 목자님 개인 소감을 읽으니 여러 생각이 났습니다. 저 또한, 목자님보다야 덜 하겠지만, 비슷한 입장에 놓이면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길 기도합니다. 드보라 선교사도 저와 비슷한 마음이고 아이들은 비행기 탄다고 하니까 매일 한국 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4) 1996년 3월 9일 바르샤바     


어제 통화하고 팩스를 받고 난 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무겁습니다. 편지를 쓰다 정리가 안 돼 포기하였습니다. 다시 통화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주일 예배가 11시입니다. 한국 시간으로 내일(주일) 저녁 9시 이후로 전화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송금은 외환은행 본점에서 외국 송금용 수표를 끊어 우편으로 보내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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