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둥에서 한국을 알아가는 인류학자의 참여관찰 여정
단둥과 압록강 이야기를 계속 읽으니 진심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 중국 북한 사람들이 단둥에서 사고 파는 생활을 하고 있음이 보인다. 단둥은 사람 사는 곳이다. 압록강이 국경이지만 두 나라를 칼같이 나누는 선이 아닌 거다. 사람들의 관념 속에나 선이 있지 현실은 서로 섞여 사는 것. 더덕욱 "압록강에 발 담그고 과일을 먹자"라는 저자의 마음이 다가온다.
단둥 관광명소라는 '압록강 단교'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이 1908년 만주진출을 목적으로 한반도를 종단하는 경부선과 경의선을 연결해 1911년 준공했다. 일본의 만주진출이 목적이었고 일제의 군사적 침략과 일본의 자본진출의 길이었다. 다리 중앙에 단선철도가 있었고 좌우 양쪽에 2.6m의 보도가 있었다. 압록강을 오르내리는 범선을 통과시키기 위해 회전철교로 만들어져 매일 2차례씩 회전 개폐하는 시스템이었다. 국제하천 압록강 답게 다리 길이 944m로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한국 전쟁 중 유엔군의 폭격으로 북한쪽 절반이 파괴되고 중국쪽은 남은 절반을 역사적 유산으로 보존했단다.
신압록강대교도 보고 싶다. 2009년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북한 평양을 공식 방문해 체결한 경제기술 합작 협정서에 따라 신설된 북한과 중국을 잇는 대교다. 기존의 합록강철교는 너무 오래되고 낡아 20t급 이상 화물 차량의 통행이 제한되는 데다 단선으로 운행돼 인적 교류와 물류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중국은 건설비 전액(28억 위안)을 부담하겠다며 압록강대교 건설을 제의했고 2011년 시작해 현재 신압록강대교는 완공된 상태이다. 2024년 9월말 개통식 후 10월 1일부터 개통 예정이라니 이번 여행 기간 개통 이벤트를 볼 수 있다면!
"단둥에서 한국 사회를 만나기 위한 참여관찰의 여정." 강주원 교수의《압록강은 다르게 흐른다》의 마지막까지 내 마음에 남는 표현이다. 인류학자의 연구 태도가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어떤 사회도 그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게 같을 수 없다. 강교수는 선입견 없이 단둥에 가서 그곳 사람들 속에 섞여들어 관찰하고 연구하며 한국 사회를 다르게 읽어냈다. 책상머리에서 하는 관념적인 연구가 아니란 말이다. 참여관찰, 매력적이다. 아~~ 이번 여행이 내게도 이모저모 낯선 삶의 참여관찰 기회가 되길!
절반 하고 남겨 뒀던 강주원 교수의《압록강은 다르게 흐른다》후반부를 발췌한다.
5.24 조치 때문에 그가 북한의 공장에 투자한 금액을 회수하지 못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잠시 지나가는 어려움을 겪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111
그래 맞아! 너무 긴 세월이 지나가고 있어! 5.24 조치에 대한 해제의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만 동시에 해제 이후에 어떻게 남과 북이 만나고 경제활동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우리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만, 요즘 단둥에서 북한 무역대표 또는 대북사업가인 조선족과 북한화교들을 만나면 그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껴. 그동안 국경 무역과 관련된 사업 노하우가 쌓인 그들을 한국의 젊은 사업가들이 감당을 할 수 있을까? 113
단둥의 국경 무역 구조의 역사와 현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5.24 조치 해제 이후를 준비하는 첫걸음이자 해제의 명분들을 확보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114
한국 사회는 단둥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용하고 있다. 하나는 5.24 조치 이전에도 그랬지만, 연구자들이 국경 무역을 북중 무역으로만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2010년 이후 한국 언론은 단둥에서 대북부역을 하는 한국사람이 없다고 보도한다. 115
5.24 조치로 장벽에 갇힌 것은 북한만이 아닌 듯하다. 북중 접경무역의 한 축을 거머쥐었던 한국 기업가들이 20여 년 동안 터 닦은 접경지역에서 지도에도 없는 변경으로 밀려났으니 말이다. (한겨레 21 2015년 3월 19일자) 116
2010년부터 5.24 조치가 남과 북의 만남을 막고 있다. 그 결과 공식적으로 남북의 경제적 교류는 짧은 헤어짐이 아닌 긴 이별이 되고 말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해제 후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 될까? 아니다. 긴 세월 헤어졌던 사람을 만날 때 쉽게 범하는 실수가 상대방을 예전의 모습으로 대하는 것이다. 121
그후 2006년 가을, 단둥의 민박집에서 박사 논문을 위한 장기 현지조사를 시작했다. 북한 아줌마가 옆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나에게 아침밥을 해주었다. 한 달 뒤, 나는 그녀가 파출부 일을 통해서 번 돈을 가지고 구입한 한국 물건을 여러 가방에 나누어 담아서 가족이 있는 신의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24
그녀들의 계약서에 담긴 인건비 액수는 단둥이 "또 하나의 개성공단"임을 보여주고, 그녀들의 월급 사용 방식을 들여다보먄 북한 사회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는 개성공단을 뒤어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단둥의 북한 해외노동자에 대한 참여관찰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127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나는 "단둥에는 한국사람보다 북한사람이 더 많다."라는 말을 한 뒤, 잊지 않고 "한인회관이 이곳에도 있습니다."라는 추가 설명과 의미를 말한다. 135
단둥에서의 의류 생산과 관련되어 중국 노동자를 활용하는 방법 이외에, 두 가지 방식이 더 있다. 하나는 평양 공장에서 생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둥 공장에서 북한 노동자를 고용해서 생산한다. 둘 다 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공통점이 있다. 140
5.24 조치와 상관없이 2010년 이후 단둥의 조선족거리는 두 가지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북한 무역 강조"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식표품 가게 증가"이다. 우선 당연히 이 거리의 가게들은 중국 제품만 판매하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북한사람들은 다양한 나라의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144
그런데 한국 정부는 한중 FTA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5.24 조치 해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다. 단둥 사람들의 범주에는 북한사람과 한국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경제활동의 역사와 현재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그동안 걸어왔고 한국 사회가 앞으로 걸어갈 남북 교류의 길이 보인다. 148
나는 현지조사를 할 때 누군가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10년 넘게 단둥의 이야기를 담은 노트에는 네 명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한다. 박지원, 손기정, 장준하, 그리고 리영희이다. 각각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단둥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종이 모퉁이에 씌어 있는 그들 이름 옢에는 늘 질문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본 장면과 내용을) 리영희였다면 (어떻게 볼까)?와 같은 것들이다. 153
단둥 친구가 사는 아파트 옆집에는 북한 가족이 산다. 두 가족은 티비와 노트북으로 한국 방송을 함께 보기도 한다. 한때 단둥에 가면 친구의 집에서 밤을 새곤 했다. 북한 가족과 이웃사촌으로 지내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있었다. 161
단둥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차량과 짐 보따리에는 각종 한국산 제품도 많습니다. 이들이 주로 구입하는 한국산 물건은 전기밥솥과 화장품, 구두, 염색약, 믹스커피 등 종류도 다양합니다. 165
저쪽 건물들이 수산물과 봉제 이외에 북한 노동자들이 중국 제품인 전기전자 부품을 생산하는 곳이다. 만약에 중국의 대북제재가 한국 정부의 뜻대로 실행이 되면 저 건물들은 텅 비게 될 것이넫, 중국 정부가 과연 자국민인 건물 주인들에게 손해 가는 행동을 할까? 북한 노동자가 빠져 나간 자리를 누구로 채울 수 있을까? 184-185
고성 지역은 2008년 7월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후 2,464억 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고 414곳의 업소가 휴폐업 하는 등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 189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대중매체를 통해 접하는 단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을까? 우선 한국 언론사들에는 단둥 주재 특파원이 없다. 이런 취재 조건에서도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 2270호"가 채택된 날인 2016년 3월 3일을 전후로 단둥발 대북제재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한국에서 달려간 기자들은 현장 취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191-192
그럼 안락의자 인류학자네요.
북한 관련 뉴스가 터질 때마다 한국 언론은 단둥 현장으로 간다. 그러나 그들이 취재한 내용은 현장에 가지 않고 연구실 책상에 편히 앉아서 보고서만을 가지고 연구하던 "안락의자 인류학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197
이와 같이 북한식당에서 이루어지는 남북의 만남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중국을 여행하는 한국사람들은 남북의 특별한 만남에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긴장한 마음으로 북한식당에 간다. 기대와는 달리, 북한 여종업원들의 차가운 태도에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넉살 좋은 한국사람은 대접을 받기도 한다. 201
북학식당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나에게 조선족 A는 한마디 한다.
당둥과 신의주 사람들은 압록강의 물을 함께 마시고 살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중국과 거의 붙어있는 황금평의 북한 주민들과는 서로 농사철 품앗이도 했다. 그러니까 이웃 동네가 아닌 한 동네 사람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207
그러나 단둥에는 20년 넘게 그들과 함께 삼국을 연결하는 경제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이웃사촌으로 살아가는 한국사람들 또한 있다. 네 집단이 있기에 남북의 만남은 꿈속의 일이나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사람들은 함께 압록강변을 걷고 있다. 208
다음날 아침을 먹으면서 8명의 북한 여성 무역일꾼들이 열심히 구입할 물품 내역을 의논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고는,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 준비한 광각 줌렌즈를 테스트할 겸 이틀 동안 압록강변과 단둥 거리를 한없이 걸었다. 조선족거리에는 "단둥-신의주-평양" 택배를 한다는 회사가 하나 더 생겨 영업을 시작했고, 여행사들마다 "무비자 조선(북한) 반나절 여행" 상품 광고에 집중하고 있었다. 212
그 순간 내 세번째 책은 이 사진과 함께 2016년 한국 사회의 대북제재 분위기와 중국 단둥으ㅢ 실상이 어떻게 다른 모습을 보였는지를 설명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는 글로 시작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나는 단둥에서 한국 사회를 만나기 위한 참여관찰의 여정을 또 다시 시작했다.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