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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Sep 18. 2024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동주와 엄마

백두산 여행, 영화 <동주>에서《딸아 너는 생각보다 강하단다》까지

백두산 일출 여행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생각을 며칠 했다. 삶이 계획표따라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돌발변수라는 게 튀어나오게 되니까. 그럼에도 아직 남은 열흘, 여행 일정표 공부는 이어가기로 했다. 첫날 가게 될 봉오동, 용정 등을 찾아보고 윤동주 묘소와 송몽규 묘소를 책상머리 여행으로 찾아가 확인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영화 <동주>를 다시 보며 아픈 우리 역사와 윤동주의 시에 젖어 보았다.


돌발변수가 있냐고? 노환의 친정 엄마가 갑자기 위독해지는 상황을 말한다. 엄마는 심장과 방광에 지병을 끼고도 집에서 그럭저럭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난주에 잠깐 들렀을 때 보니 기력이 많이 약한 상태지만 위급하기까진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저께부터 혈뇨를 심하게 쏟아내고 전신 무력감과 통증을 호소했다. 자식들이 다 떨어져 있으니 전화통만 불아 났다. 연휴인데 쇼크라도 올까 걱정되는 상태였다.


독거노인이 혈뇨를 쏟다가 홀로 쓰러진다? 내 엄마의 마지막 시나리오일 수도 있었다. 요양보호사도 안 오는 연휴가 시작됐는데 진짜 위급한 상황인 걸까? 엄마 상태를 생각하다 보니 자꾸만 '위독'이란 단어가 떠오르고 백두산 천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여행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있는 건가? 다행히 일요일부터 추석날까진 올케와 조카들이 있었고 이어서 여동생 부부가 한 밤 자고 엄마를 입원시키고 갔다.

 

'엄마 상태가 이런데 3박 4일씩이나 딸이 해외여행 가는 거 맞나? 백두산 여행 중에 위급한 소식 듣게 되는 거 아냐? 여행 임박해서 엄마가 위독해지면 어떻게 하지? 혹시 돌아가시기라도 하는 거 아닐까? 여행 취소하고 엄마와 3박 4일 시간을 보낼까? 엄마를 위해선 이틀도 시간 내기 어려운데 아픈 엄마 두고 해외여행 가는 게 맞나? 무슨 일 생기면 중국에서 나혼자 갑자기 돌아오는 건 가능한 걸까?...' 


꼬리를 무는 질문 속에 연휴가 휘리릭 갔다. 알량한 착한 딸 콤플렉스가 발동한 거 같다. 내가 책임질 것도 없는데, 직접 달려갈 것도 아니면서,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다행히 오늘부터 혈뇨는 잦아들며 엄마는 입원해서 돌봄을 받고 있다. 이런 식으로 엄마는 몇 년째 한 두 주 단위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요즘 거의 매일 엄마랑 통화하지만 백두산 여행 계획은 아직 말하지 못했다. 왜일까? 이럴 때 보면 나는 영락없는 K장녀다. 백두산 여행 과감히 포기하고 엄마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딸, 그림이 좋아 보여? 훅 작년에 이프에서 토론한 책《딸아 너는 생각보다 강하단다》가 생각났다.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엄마를 두고 세계 여행을 떠난 딸이 있었다. 긴 여행 중에 엄마 부고를 받고 돌아와 장례치르고 다시 남은 여행을 마치는 경우였다. "딸아 너는 생각보다 강하단다"는 엄마가 평소 딸에게 해 준 말이었다. 


이 책이 여기서 왜 생각났을까? 백두산 못 갈지도 모르겠다고? 왜? 엄마를 위해서?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착한 여자 컴플랙스였나?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기 욕망을 쉽게 포기하는 버릇이었나? 그래, 딸아 너는 생각보다 강하단다.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고 듣고 싶은 말이었을까. 약한 맘일까? 너무 강한 건가? 아픈 엄마도 챙기고 싶고 꿈의 백두산 천지도 보고 싶고, 나중에 후회할 부끄러운 선택은 안 하고 싶고....  


백두산 가는 길이 봉오동 용정에서 시작해 영화 <동주>로 갔다가 책《딸아 너는 생각보다 강하단다》에 닿았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길, 동주와 엄마, 이런 제목은 또 뭔가? 이게 서로 무슨 관계인지는 제발 묻지 말라. 의식의 흐름이라 하자. 이제 영화 속 명대사와 윤동주의 시로 흐르며 마치련다. 아참, 윤동주 시인께 묻고 싶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설마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송몽규: 동주야! 신앙이 뭐이 저래 중요하니. 온 세계 인민이 계급도 차별도 없이 사는 게 중요하지. 

윤동주: 야, 니 공산주의자 같다, 야. 

몽규 아버지: 거 평등이라는 거 뭡메까? 우리 거 다 말살하자고 그러는 거 아입메?

송몽규: 아버지나 내나 저 신앙에 의지가 안 되나 보지 뭐.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정지용: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당신 말을 들으니까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못하겠습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습니다. 


송몽규: 제 뼛조각 하나 이 땅에 남지 않게 해주십시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하였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사망하고 6개월 뒤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한다. 후쿠오카 감옥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1,800여명이 사망했다. 


우물 속의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며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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