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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Sep 20. 2024

단둥에 가면 페미니스트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서양화가, 페미니스트 작가, 독립운동가 나혜석을 기억하며


"9월 28일 오전 5시 백두산 천지 날씨는 영상 3도 전후, 그 외 지역은 25도 전후로 예보."

"3박 4일간 한국 날씨와 같다고 생각하면 됨. 천지에 갈 때만 내복 혹은 초겨울 잠바 입고 돌아와서 벗음.”

"3일 차 아침 6시쯤 중국 전통 아침 시장. 저녁 8시 백석 시인과 나혜석 화가도 살았던 단둥에서 야시장 체험. 이왕이면 함께…"    

 

백두산 천지 해맞이 여행이 딱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끄미 강교수님이 올려주는 여행안내 파일엔 아침 기상 시간부터 시작해 자유시간, 음주와 개인행동 자제, 여권분실과 낙오, 여행지에서의 사진촬영, 화장실이 별로 없다는 정보까지 세세히 망라돼 있었다. 거기에 먹을 것 볼 것이 더해지고 장소와 사람과 역사가 버무려지는 게 여행이겠다.     


여행 3일 차 단둥 일정에서 번쩍! 내 눈에 들어오는 이름 하나, 나혜석이 있었다. 단둥에 가면 나혜석이? 읽고 있던 강주원 교수의 책 《휴전선엔 철조망이 없다》를 덮어 옆으로 밀어뒀다. 외교관 남편을 따라 나혜석이 1920년대에 만주에서 생활한 적 있다는 건 내가 아는 역사적 사실인데, 그 만주가 바로 단둥이었다니, 유레카였다!


'백두산 천지 해맞이 여행' 브런치북 15번째 연재글은 그렇게 나혜석이 주인공으로 쓰게 됐다.   


        

조선의 1세대 페미니스트 나혜석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요 여성운동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은 요즘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일본 유학 시절 사귄 남자가 하필 유부남이었는데 본처와 이혼하고 나혜석과 결혼하려던 중에 결핵으로 죽고 만다. 슬픔에 빠진 나혜석을 친오빠 친구인 10살 연상의 변호사 김우영이 위로하고 마음을 얻는다. 그는 신여성 나혜석이 제시하는 결혼조건을 다 수용하며 결혼에 골인한다.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 줄 것.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요즘 기준으로 봐도 신부의 요구로는 파격적이었다.1920년의 조선 사회가 변화무쌍하긴 했나보. 당당한 신여성은 당시 지식인 남성들에게 ‘트로피’ 같은 존재였다. 상처한 김우영은 신여성 혜석을 얻으려고 조건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으로 최승구의 묘지를 찾아갔고 비석도 세워주었다. 그 일로 김우영은 공처가 애처가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나혜석도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될 정도로 화제였다.       


나혜석이 단둥으로 가게 된 건 김우영이 단둥 부영사로 부임하면서였다. 외교관 부인으로서 거기서 나혜석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독립운동가였다. 즉,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에 힘썼고 애국부인회와 의열단 그리고 임시정부에 자금을 몰래 지원했다. 특히 영화 <밀정>에 나오는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1923) 뒤엔 나혜석이 있었다는데 영화엔 다뤄지지 않았다. 나혜석의 활동 때문에 남편 김우영이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이 될 정도였다는데 말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장영은 엮음, 민음사, 2018)은 나혜석을 ‘글 쓰는 여자’라 이름하는 책이다. 조선 최초로 유럽여행을 한 서양화가, 그때만 해도 화려한 신여성 이었다. 그러나 잠시 연인이었던 최린에게도 사랑을 약속한 남편에게도 버림받아 혜석은 이혼당하고 무연고 행려병자로 고독하게 죽어야 했다. 책은 그를 실패한 여성운동가라든가 비극의 주인공이라 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의 탄생”이라고 정리한다. 가부장제가 규정하는 삶 말고 스스로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여자,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고.

     

나혜석은 자전적 단편 소설 《경희》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평등한 인간, 사람으로 살려할수록 비난과 낙인이 따랐다. "우리가 비판받지 않으면 무엇으로 역사를 채우겠냐"며 꿋꿋이 글쓰며 버텨냈다. ‘이혼고백장’을 공개적으로 쓰고 ‘모母된 감상기’를 썼다. 여성을 딸로 아내로 엄마로 남성 아래 묶어두려는 “인형의 家”를 박차고 나가는 노라가 됐다. 집에 기생을 데려와 멋대로 ‘풍류’를 즐기면서도 여자에겐 ‘정조’를 요구하는 조선 남성의 위선과 이중성을 까발렸다.  

    

100년전 글 쓰는 여자로 낯선 새 길을 걸어간 나혜석. 글 쓰는 여자들이 탄생하고 있다. 수원 나혜석 거리에만 아니라 단둥에도 나혜석이 있었다. 아니 나혜석처럼 말하고 글 쓰는 나와 내 주변 여자들이 있다. 가부장제의 언어를 거부하고 자기 언어로 말하고 글 쓰는 여자들. 오늘도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 이어진다. 비난받고 욕먹는 여자들을 응원하는 혜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비판받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역사를 채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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