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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망가지고 함께 버틴 사랑

돌봄 글쓰기 3주, 다 보고 나서야 눈물이 난 영화 <봄밤>

by 꿀벌 김화숙

소설이 원작인 영화를 보면 늘 초반 몰입이 어렵다. 작품을 읽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경우가 더 심하다. 자꾸 소설 속 문장이나 상황을 떠올리며, 뭘 어떻게 다르게 만들었나 비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하, 그 장면을 이렇게 앞으로 당겨 처리했다고? 그 인물 캐스팅은 완전 제대로인걸? 이런 식이다. 영화를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구나, 부질없는 짓 그만두고 영화 속으로 집중한다.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니까.


영화 <봄밤>은 원작 읽은 작품인데도 바로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권여선의 단편집『안녕 주정뱅이』를 읽은 지 몇 년이 지난 덕분이었다. 단편집 속의 맨 첫 작품『봄밤』의 그 강렬한 여운을 어찌 잊었겠는가. 아련한 소설『봄밤』을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았다. 오직 영화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


영화관을 나와서 글을 써 보려 앉았다. 슬프고 아파서 감히 어떻게 풀어낼 수가 없었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세상에, 다 보고 나니 눈물 나는 영화라니. 그 여자 그 남자, 어떻게 해. 아, 참을 수 없는 탐구심이 발동했다. 영화와 소설이 어떻게 다른지, 결국 소설『봄밤』을 찾아 다시 읽었다.



<봄밤>은 지지리 상처받고 벼랑으로 내몰린 여자와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야기다. 인간의 존엄이 위태한,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바닥에서 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 맞다. 소설 『봄밤』은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알코올중독자 여자만 자꾸 보여 그 곁의 남자가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 <봄밤>에 여자의 언니들이 등장하지 않은 건 잘한 연출이었다. 여자에게 집중하면서 동시에 그 곁의 남자를 더 볼 수 있었다."함께 망가지고 함께 버틴 사랑"이었다.


나는 왜 망가지는 사람에게 무한 감정이입하는가. 망가지는 여자의 기분, 느낌 아니까, 나를 보았다. 여자가 순식간에 소주와 맥주를 몇 개씩 비워낼 때,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또 비적비적 일어날 때, 또 쓰러질 때, 김수영의 시를 읊을 때, 눈물 흘리며 울어 댈 때. 세상의 '정상 가정'도 '정상 사회'도 '정상 결혼'도 다 신화라고 까발리는 것 같았다. 모든 '정상성'에게 배신당한 여자와 남자였다.


'정상'에서 이탈한 사람들, 주류에 끼지 못한 사람들, 거기 사각지대가 잘 보였다. 그들이라서 보여줄 수 있는 사각지대. '정상'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그늘, 제도가 미치지 않는 그늘을 똑똑히 보았다. 결국 함께 망가지고 함께 버텨내다 함께 스러지는, 그건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극한인데 너무 기시감 드는 사람 이야기. 나는 눈물 흘릴 틈도 없이 숨죽이다가, 다 보고 나서야 눈물흘렸다. 그래서 쓴다.



화요일에 함께크는여성울림 '돌봄 글쓰기' 3주 차를 잘 마쳤다. '여성의 글쓰기란' 주제로 PPT강의하며 젠더렌즈로 보자, 나만의 방식으로 했다. 샘플 에세이 분석하고 써온 글 나누며 수다떨었다.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도 들었다. '약자'의 자리에 있어 본 사람의 눈, '정상'에서 비껴간 사람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생물학적으로 여자라고 다 여성의 글쓰기를 하는 건 아니다. 결국 자기 목소리를 찾자는 '정치적' 이야기였다.


입장이 모호한 글쓰기, 많이 보았다. 내 인생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았다고 고백했다. 자기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 누군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힘가진 주류가 주입한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삶이었다. 그게 미덕이라 배웠으니까. 내 목소리를 가져도 되는지 조차 몰랐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남성 중심 세상이 만들어 놓은 '명예 남자' 말고 자기 언어로 말하자면, 언어를 찾아 헤매며 질문하는 숙명, 피할 수 없다.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로 프랑스의 지젤 팰리코도 소환되고 우리나라 최말자 씨도 불러냈다. 버지니아 울프도 오고 정희진도 데려왔다. 같은 사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그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어떤 좌표 위에 서 있느냐,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 글들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 그거였다. 각자 자기 좌표를 발견하고 입장을 가지고 쓰자. 영화 <말임 씨를 부탁해>와 <봄밤>으로 사각지대도 이야기했다.


글쓰자고 모인 분들이 볼수록 아름답다. 써온 글을 읽고 나누며 서로 마음이 통해 울컥하고 눈물 훔친다. 목이 매어 옆에서 대신 읽어 준다. 같이 한숨쉰다. "여성, 돌봄을 쓰다" "내가 쓴 글이 나를 돌본다" 글쓰기 교실 풍경이다. 영화 <딸에 대하여> 토론 준비부터 세어 보니 벌써 7주가 지났다. 다시 2주간 여름휴가로 강좌 쉬어 간다. 긴 호흡의 글쓰기 여행, 각자 자기 언어를 고민하며 글을 쓰고 또 만날 것이다.


내가 강좌 이끄미란 게 너무 좋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한다. 망가진 사람, 아픈 사람, 눌린 사람, 비주류의 시선, 이걸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 이면을 보는 입장, '정상'에서 밀려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사각지대, 그들만이 가진 힘, 글쓰기의 힘을 느낀다. 여름 무더위 속에 '함께 망가지고 함께 버틴 사랑'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그들 중 하나이면서 그들을 지지하고 같이 쓰는 내가 좋다.


정희진이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서 한 말 그대로다.

"내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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