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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덕숙덕 복싱 클럽

머리와 가슴과 입과 몸이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은 배움이겠?

by 꿀벌 김화숙

"여기는 복싱을 전문으로 하는 곳인데요?"

접수대 쪽에서 젊은 남자가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운동구와 링이 설치된 체육관 내부를 재빠르게 일별했다. 예상한 몇 가지 대사 중 하나여서 회심의 미소를 크게 지으며 말했다.

"네 알고 왔어요."

그는 표정을 살짝 풀며 접수대로 나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복싱 배우고 싶어서요."

환한 얼굴로 그가 반응했다.

"아, 그러시군요. 멋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 된달까봐 들어올 때 살짝 긴장했잖아요."

나를 안심시키듯 그는 관장이라고 소개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됩니다. 남성은 중년도 있고 70세도 있어요. 어차피 복싱은 개인교습이라 괜찮아요."

아싸, 신난다, 이게 뭐라고, 과거에라도 급제한 기분이다. 그가 진지하게 질문했다.

"혹시 디스크 수술한 적 있을까요? 허리가 아프시다거나."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전혀 아픈 데 없다는 내게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다른 관절은요? 무릎, 발복, 고관절, 팔목.... 관절 아픈 덴 없을까요?"

없다고 또박또박 답했다. 평소 운동 많이 하냐길래, 매일 걷고 동네산 쏘다니는 정도라 말하는데,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났다. 머리숱 치아 뼈 건강, 이런 건 울 엄마한테 물려받은 거 맞으니까.


"멋지네요. 건강해 보이세요. 좋습니다."

또 한번 칭찬이다. 60대 중반에, 복싱을 배울 생각을 한다는 건 아픈 데 없이 활기찬 몸과 맘 덕분 맞다. 쨉쨉훅, 흰머리를 날리며 폴짝폴짝 뛰는 내 모습이 그려지니 몸이 근질근질한 거 같다. 막상 시작하면 뻣뻣하게 안 따라주는 몸에 한숨쉬겠지만 말이다. 시설 이용, 강습 안내, 장비며 비용 등을 설명한 후 그가 말했다.

"생각해 보고 결정해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어라? 돌아가란 소리 같았다. 상담만 받는 취재를 전혀 생각 안 한 건 아니지만, 지금 결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겨울 동안 집필과 운동에 집중할 작정이니까. 아쉽게도 자리가 다음 월요일부터 난단다. 빨간색으로 글러브와 핸드랩을 고르고 신청서 목적 난에 '체력단련'이라 쓰며 폭풍수다를 떨었다.


"격투기 하나 해야 해, 딸하고 몇 년 전부터 노래를 했거든요. 작년인가? 저쪽 동네 걸어가다가 복싱이란 글자를 보고 불쑥 들어갔다가, 거절당했어요. 우리 아들이 그러대요? 복싱 도장 가면 처음엔 줄넘기만 엄청 시킬 거라고. 그래요? 그럼 오늘 줄넘기라도 좀 하면 안 돼요? 처음엔 살살 가르쳐주실 거죠?...."


그렇게 난생 처음 복싱 강좌에 등록했다. 집에서 도보 5분 거리다. 3개월 치 할인가 39만 원에, 필수장비(글러브 4만 원, 핸드랩 2만 원, 줄넘기 1만 원) 값과 운동복(티셔츠)과 사물함 이용료 2만 원 합해 48만 원 결제했다. 겨울 집필모드. 글 쓰다가 달려가 복싱하고 땀 흘리고 씻고 또 쓰는 '동안거'를 꿈꾼다.




입으로만 노래하던 복싱을 행동으로 하기까지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격투기 하나쯤 배우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건 4년도 더 전이었다. 영화 <에놀라 홈즈 1> 를 보고나니 더 그랬다. 몸을 쓰는 싸움은 고사하고, 싸움 자체를 두려워하던 여자아이. 싸움 안 만드는 게 상책인 줄 알던 여자. 그러나 알고보니 싸움이란 내 뜻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상이었다. 공격할 주먹 힘도 달아날 달리기 실력도 내겐 없었다. 중년이 복싱을 생각했다.


머리에만 있던 복싱이란 단어가 몇 년만에 몸이 된 셈이다. 짝꿍 덕과 연재 브런치북 <숙덕숙덕 싸움 공부> 제목을 씹고 뜯고 수다떨 때였다. 아무래도 밋밋하다, 매력적인 제목 좀 생각해 봐, <싸움의 기술>은 같은 제목으로 나온 책이 있어서 별로야. 그러다 보니 싸움 클럽도 나오고 싸움 연구소도 나왔다. 싸움이란 말 안 쓰고도 은유와 상징으로 싸움 이야기하면 어때, 수다가 거기까지 갔다.


"차라리 직설적이지 않게 <숙덕숙덕 복싱 클럽> 어때?"

덕의 입에서 나온 제목이었다. 싸우는 이야기는 결국 치고박는 복싱이랑 딱 닮은 거란다.

"문제는 내가 진짜 복싱은 해 본 적이 없다는 거야. 1도 모르면서 제목만 복싱클럽, 좀 웃기잖아?"

덕이 내 맘을 간파한 양 자신있게 밀어붙였다.

"복싱 배우면서 쓰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복싱 노래했잖아. 복싱 용어는 일상에도 쓰여서 글이 재밌을 거야. 쨉쨉훅이니, 펀치를 날린다, 알잖아. 바로 복싱 학원 알아보고 등록하는 거야."


브런치북 제목은 <숙덕숙덕 복싱 클럽>으로 수정됐다. 복싱 체육관 등록하고 와서는 내 책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생각비행, 2022)에서 '우리 격투기를 배웁시다'가 처음 등장하는 꼭지를 펼쳐보았다. 영화 <에놀라 홈즈 1>(2020) 토론하며 복싱을 생각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4년여 걸린 실행이었다.


나: 그럼 에놀라 모녀에게서 힌트를 얻어서 우리 모녀 사이에 적용해 볼 것으로 뭐가 보여?

딸: 우리 격투기를 합시다!

나: 맞아 맞아. 그 엄마는 어떻게 그 시대에 격투기를 딸에게 가르칠 생각을 했지?

딸: 땀 흘리고 침 튀고 숨 헉헉거리는 운동이지. 코로나 이후엔 호신술을 해야겠어.

나: 너 태권도 잘했잖아. 다시 할 생각 없어?

딸: 있지. 시험 끝나면 뭐라도 할까 봐. 에놀라는 위기에 누가 도와주길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머리 쓰고 몸 써서 헤쳐나가더라. 몸싸움 끈질기게 잘하더라.

나: 그렇지. 그런 건 길러야지,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영화 <에놀라 홈즈 2>(2022)에서 에놀라와 엄마와 이디스가 주짓수로 남자 경찰들을 때려 눕히는 장면으로 가 보자. 100년 전, 성별이분법이 진리로 통하던 빅토리아 시대에, 격투기를 배우고 쓴 씩씩한 여자들에게로. 몸으로 "싸우고 이기고 도망하며"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바꾸어낸 여자들 이야기다.

영국에서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딸들과 함께 써프러제트(여성 참정권자)를 조직한 게 1903년이었고 21세 이상 여성이 보편 투표권을 얻은 건 1928년이었다.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와 친구 이디스가 서프러제트였다.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서프러제트들이 주짓수를 배우게 했다. 싸우다 수감되고 풀려나고 하자면, 몸을 단련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에멀린 팽크허스트(Pankhurst)의 여성 호위무사들은 '서프러짓수'라 불릴 정도였다.

'주짓수'는 호신무술 또는 격투기 종목의 하나다. 체구가 작은 여성이 상대의 힘을 역으로 이용해 제압하는 기술이라 여성에게 가장 맞는 호신무술이라 평가받는다. 유도리아는 이디스에게서 주짓수를 배웠고, 어린 딸 에놀라도 배우게 했다. 엄마의 '남다른' 교육 덕분에 에놀라는 힘세고 싸울 줄 아는 여자로 자랐다. 소녀들은 신부수업 기숙학교에 보내질 때, 에놀라는 주짓수, 폭넓은 독서, 과학 실험,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

세 여자가 격투기로 남자 경찰들을 때려눕히는 장면은 볼수록 아름답다. 에놀라를 탈옥시켜서 이디스가 마차를 몰아 셋이 도망하다 추격하는 경찰에게 공격받고 마차가 뒤집혀 버린다. 세 여자는 독 안에 든 쥐. 수갑이 채워지려는 순간 이디스가 경찰관을 때려눕히자 세 여자와 세 경찰의 몸싸움이 벌어진다. 주먹 쓰고 발길질을 하고 총과 방망이를 휘두르는 남자들을 상대로 세 여자가 격렬하게 싸운다.

3분간이나 롱샷으로 이어지는 싸움 장면에, 배경음악이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 합창곡 '할렐루야'다. 긴 치마 입은 세 여자가 바지 제복 입은 영국 경찰들과 격투하는데,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음악회에서 <메시아> 연주가 2부 마지막에 이르면 관객이 모두 기립하고 듣는 곡, "주를 찬양하라"는 할렐루야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찬양하는 음악이 어떤 대사보다 싸움장면을 잘 표현했다.


세 여자는 크고 강한 남자들을 이기고 탈출에 성공한다. 여기에 할렐루야! 의 비밀이 숨어 있는 거 아닐까. 공고히 유지되던 여성혐오와 여성차별의 사슬이 끊어지고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실낙원의 지긋지긋한 이분법의 벽이 허물어지고 배제되고 차별받던 여성들이 싸워 이긴다. 이게 부활 아니고 뭐냐고, 이게 주의 뜻 아니고 뭐냐고, 역대급 음악이 할렐루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영화는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지론을 보여주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그렇다. 안 싸우는 여자는 훌륭한 것도 여자다운 것도 아니다. 먼저 숙이고 양보하고 목소리를 죽이는 여자는 결국 진다. 싸우지 않고는, 투표권 하나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삶에서 싸움에서 이긴 경험은 아주 중요하다. 싸움에서 이긴 이후 또 다른 동지들과 손잡고 새로운 싸움을 하는 에놀라를 보라. 성냥공장 여성노동자들과 연대로 에놀라의 삶은 더 확장된다. 더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 이게 바로 할렐루야다.


복싱 체육관에 등록하고 질문하게 됐다. 머리로 아는 게 몸으로 움직여지기까진 왜 이런 시간 차가 있지? 몸은 안 움직이는 앎, 그건 앎이 아니라 착각 아닐까? 몸이 기억하는 배움이 진짜 아닐까? 복싱 등록과 복싱하는 건 또 다르지? 몸이 움직이면 왜 기분이 좋을까? 근데 말이야... 숙덕숙덕 복싱 클럽이라면서 너무 부창부수 아냐?....

마음과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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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