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내란 1년, 정치권력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사회의 꿈
내가 싸움 이야기로 책 쓴다 했을 때, 한 남성 지인이 보인 반응이 놀라왔다.
"와, 알고 보니 아주 호전적인 분이었군요? 무서워요~"
행사장에서 만나 잠깐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세번 째 책은 어떤 주제냐는 질문에 대한 최선의 짧은 답변이었건만, 역시나 였다. 설명하기 보단 웃으며 넘겨야 했다.
"그렇게 되는 건가요? 저도 몰랐던 정체성을 찾아 주셨네요."
그는 자기가 한 말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득였다.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왼쪽 옆구리로 손이 갔다. 훅! 라이트 훅이 날아들었던 착각이었다.
'싸우거나 전쟁(戰)을 좋아함(好), 공격적이고 적의가 많은 태도. 좋을 호(好) 싸움 전(戰) 과녁 적(的), 호전적, 호전적이라....'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정말이지 낯설고 새로운 내 모습과의 조우였다.
'오다가다 들은 말 가지고 뭘 그리 곱씹고 의미를 부여하고 자빠졌냐? 그거야 말 하는 사람 맘이지, 그게 너란 법이 어디 있어? 생각은 자유라잖아.'
그렇게 떨치보려 했지만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지금 싸움을 좋아하는가?
과거에 싸움을 좋아한 적이 있던가?
나는 어떤 상황에서 적의를 느끼고 공격적이 되지?
질문은 꼬리를 무는데 어느 것에도 쉽게 Yes라 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곱씹어 보고 자꾸 생각하는 걸까? 싸움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싸움에 대해 책을 쓸 생각을 했지? 그렇게 질문하니 "절대 호전적인 사람이 아냐!"라고 말할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그러자 세번째 마지막 질문이 맘에 들었다.
살다 보면 유독 어떤 사안에 대해서 '뚜껑이 열려' 반응할 때 있잖아. 세상에 맨날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실은 삶이 그렇게 흘러간 거지 싸움이 좋아서 한다는 경우는 많지 않을 거야. 특히 나같은 여자에게, 평화주의자란 소리 들을지언정 호전적 싸움꾼 소리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 맞다. 트럼프같은 '전쟁광'이면 몰라도. 아무튼 어떤 상황에서 급 공격적이 되고 적의를 느끼는 나는 호전적인 사람일까?
나는 싸움을 두려워하는 여자였다. 싸움 구경도 싫고 싸움질하는 영화도 싫어했다. 주먹다짐하는 싸움도 밥상 날아가는 부부싸움도, 국가 간 전쟁도, 안 보고 싶은 세계였다. 사람이 사람을 패서 이기는 게 무슨 스포츠냐, 격투기 종목은 금메달을 따도 한쪽 눈을 가리고 봤다. 한국 영화 <싸움의 기술>이 장안의 화제가 됐을 때도 나는 눈도 깜작하지 않았다. 그런 영화는 쌈박질하는 사람들이나 보라면서 말이다.
“니 안에 가득 차 있는 두려움, 맞아 본 자의 두려움, 그걸 깨부숴야 돼.”
이런 대사가 인용된 글을 읽은 건 10년도 더 전 일이었다. 와락 <싸움의 기술>을 찾아서 보았다. 내게 꽂혀 들어온 대목 '맞아 본 자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싸움 고수 판수(백윤식) 아저씨가 싸움 못하는 고등학생 병태(재희)에게 가르친 핵심 싸움의 기술이, "맞아 본 자의 두려움을 깨부숴야 돼"였다. 나는 '두려움'도 알고 '맞아 본 자의 두려움'도 아는 사람이라, 많이 얻어맞는 남고생 병태에 공감하며 영화를 봤다.
그때 처음으로 내 몸에 각인된 맞아본 자의 두려움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물리적인 폭력을 당한 건 어린 시절이었다. 20대와 30대엔 정신적 영적 가스라이팅으로 맞았다. 맞아본 자의 두려움, 이게 내 안에 있으면 나는 맞기 전에 먼저 굽히게 된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가 사과해야 끝나는 구조, 내가 '회개할 죄인'이 되는 질서, 힘있는 상대를 높여주고 감사하도록 길들이는 문화. 할말을 삼키고 힘 앞에 침묵하기. 그건 모두 욕 들을까, 미움 받을까 떠는 맞아본 자의 두려움이었다.
내 인생 50까지 이 두려움에 매여 종노릇하고 살았다. 암수술과 갱년기가 나를 깨워준 덕분에, 두려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음 앞에 한없이 작고 유한한 인생이었다. 두려움에 매여 계속 쳐맞고 살 것인가? 계속 고분고분할 것인가? 병원에 분노하는 게 그 시작이었다. 가족과 교회와 세상에 더 이상 맞고 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분노를 폭발하며 싸움하는 여자가 됐다.
나처럼 싸울 줄 모르던 우리 큰아들도 이 영화를 좋아했던 게 기억난다. 싸울 줄 모르는 엄마가 아이에게 싸움의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태권도장에 보내는 것뿐이었다. 아, 지금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덜 혼내고, 덜 엄격하게, 맞아본 자의 두려움 따위 모르는 아이로 키울 텐데. 스스로 자신을 지키며 싸움할 줄 아는 위풍당당 엄마로 살고, 당당한 아이로 키울 텐데....
'호전적'이라는 단어가 내 맘에 안 드는 이유를 알 거 같다. 여자가 그렇다니, 오해와 낙인이 되는 불편함이었을 게다. 예순 넘은 여자에게 세상이 기대하는 모습을 내가 왜 모르겠나. '호전성' 말고 '온화함, 푸근함, 관대함', 이런 걸 기대하리라. 하지만 맞아본 자의 두려움 말고 호전적, 낙인만으로 들을 일도 아니잖나? 누군가를 공격하고 못 살게 물어뜯는, 여성혐오적인 낙인의 언어가 문제적이겠다.
다시 생각해 본다. 나 자신을 망가뜨리려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자는 싸움이 나쁜 건가? 처맞으면서도 부드럽게 미소짓는 여자가 되라고? 나는 기꺼이 호전적인 사람이 되련다. 권력을 쥔 트럼프의 호전성 말고,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힘으로 떨쳐 일어서련다. 복싱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거다. 상대가 휘두르는 주먹을 날쎄게 피하며 나를 보호하고 중심을 지켜야 한다. 물리적 거리를 뚫고 들어오는 공격을 몸으로 막자니, 착한 여자 껍데기도 부드러움의 가면도 벗어 던지고 싸울 수밖에 없다.
맞아본 자의 두려움, 그걸 깨부수고 싸우다 '호전적'이란 소리도 듣는다면, 영광이다. 이제 새로운 언어로 다시 정의하련다. 나는 호전적인 사람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일없이 싸움을 좋아할 리가 있나. 싸움에 돌입하게 만드는 상황, 나를 분노하게 하고 적의를 품게 하는 지점을 보라. 나를 못 살게 하는 부당한 힘에 대해 분기탱천 싸울 태세다. 맞아본 자의 두려움을 깨부순 용기 아니고 뭐란 말인가.
생존적 당당함, 위풍당당, 굴복하지 않는 저항, 단단함, 용기 그리고 또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