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혼인예식에서 생활한복 바지저고리와 배자를 걸친 내가 보인다
인사동 한복집을 구경하다가 생활한복으로 50만 원을 질러버렸다.
내년 여름 막내아들 혼인예식에서 내가 입을 '혼주 예복'을 이 겨울에 샀으니, 지른 거 맞다. 전 날 혜화에서 두 군데, 인사동에서 눈으로만 본 매장까지 합치면 다섯 번째 매장에서 끝낸 셈이다. 평소의 내 실력으론 이 정도 돈 쓰는 옷을 사자면, 비교하고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엄청 걸렸을 거다. 이번엔 역계절 쇼핑에, 사계절용 생활한복을, 여럿 안 입어보고 시원시원 결정할 수 있었다.
연한 팥색 저고리에 진한 곤색 핫바지, 그 겉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보라색 배자를 입기로 했다. 배자와의 첫 만남이라 그런가. 옷이 날개라 했던가? 사각대는 날개 옷이 내 몸을 하늘로 날려줄 것처럼 기분좋았다. 흰머리에 화장 안 한 주름진 내 얼굴이 환하게 빛나 보이니, 바로 너로구나 싶었다. 후에 혼주 예복 값으로 아들이 돌려주면 기쁘게 받는 거고, 아니어도 나를 위해 통 큰 선물하는 맘. 과감히 결제했다.
"평소와 다르게 과감하게 결정했네? 막돌이도 아직 시간 있으니 더 둘러볼 줄 알았던 거 같지?"
패션쇼를 지켜보고 사진 찍고 하던 짝꿍이 가게를 나서며 거듭 말했다.
"맞아. 내 기분이 오늘은 그렇게 흐르대? 내가 어떻게 입고 싶은지에만 집중했어. 응대하는 사람도 옷 분위기도 다 맘에 들었어. 엄청 발품 팔 줄 알았는데, 내 맘에 드는 옷에다 새 친구까지 얻은 기분 좋네."
그랬다. 원하는 물건을 잘 골라 좋은 가격으로 사는 건 늘 어려운 과제였다. 주머니가 두둑한 것도 아니고 쇼핑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니 어쩌겠나. 그러나 이렇게 쉽게 저지를 수도 있다니,,. 어떻게 그랬지?이번엔 꼭 내가 입고 싶은 식으로 입으리라,마음의 소리를 믿었달까. 옷을 파는 사장님에 대한 신뢰감도 한몫했겠다. 과하게 친절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서비스와 내 수다가 이룬 케미였다.
두려움이 없으면, 자신의 마음을 따르면, 크고 무거운 일도 놀듯 하는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었다. 실패하기도 하겠지, 그럼 떡 사먹은 셈 치는 거야. 오직 똑 같은 옷에 갇힌 기분으로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진 않았,다. 혼주 엄마 옷은 당연히 치마저고리인양, 아니면 흉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휘둘리기 싫었다. 컨베어벨트 물건처럼 흘러가고 싶짓 않아 내가 먼저 결정해 버렸다. 내 짝꿍은? 무난하게 양복 입겠단다. 신부 측 부모들도 원하는 대로 입으시리라. 나머지는 모르겠다.
코미디 영화 <애비규환>은 대학생 토일이 고등학생 호훈을 과외하다가 연애하고 임신해서 결혼하는 이야기다. 똑똑한 여자가 어리고 어리바리한 남자와 엮이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게 된다. 철부지 같은 호훈과 결혼하는 게 맞나, 망하면 어쩌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새아빠와 엄마와 15년째 살고 있는 토일에게 결혼은 결코 가벼이 저지를 일이 아니었다.
"무서워 죽겠다고. 가만히 있으니까. 엄마는 결혼하고 이혼하기라도 했는데 나는 벌써 이렇게 됐잖아."
토일이 결혼하는 게 맞나 심각하게 혼란에 빠졌을 때 털어놓은 말이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배는 점점 불러오는데, 결혼은 커녕 파혼하고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엄마는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그러냐면서도 토일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마주하게 도와준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될까 봐 무섭다 이거네. 나라고 망할 줄 알고 결혼했겠냐?"
엄마도 토일이처럼 똑똑한 줄 알고 시작했는데 살다 보니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더라며 한마디 덧붙인다.
"생각해 보면 망해도 완전히 망한 건 아닌 거 같아. 이 인간 때문에 너를 만났잖아."
그거였다. 망한 줄 알았던 그 인생에서 엄마는 토일이를 얻었으니, 망하는 거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살아보라고 토닥이고 있었다. 그렇게 토일과 호훈의 결혼식으로 영화가 끝난다.
결혼식은 우리 속에 깨기 어려운 통념 덩어리들을 깨 주는 잔치였다. 신랑 호훈의 친구들은 교복 입은 남자 고등학생들이다. 신랑 아빠는 예복으로 한복을 입었고 호훈의 엄마는 단발머리에 화사한 투피스 치마 정장차림이다. 자유롭게 웃고 떠들며 잔치를 즐기는 엄마 곁에서 아빠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낸다.
신부 토일은 볼록한 배가 드러나게 오프숄드 드레스를 입고 꽃을 들었다. 곁에는 흰 셔츠와 짙은 넥타이 위에 까만 바지 정장을 입은 엄마가 서 있다. 토일이를 15년간 키운 현재의 아빠는 양복저고리에 꽃을 꽂고 혼주석에 앉아 모녀 쪽을 자꾸만 돌아본다. 토일이 생부는 양복저고리에 꽃을 꽂고 하객석에 앉아 있다. 신부 입장을 기다리며 엄마는 "이게 뭐라고 왜 이렇게 떨리냐" 고백한다.
"엄마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엄마가 왜 떨리냐"라는 토일에게 엄마도 마음속 두려움을 고백한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토일이 "어차피 사람들은 내 배밖에 안 봐."라고 내뱉고 모녀는 서로 바라보며 밝게 웃는다. 긴장이 풀린 엄마가 토일에게 묻는다. 배드민턴 장에서 호훈이한테 귓속말로 뭐라 했냐고. 토일은 이 결혼 망해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놀라 눈이 똥그래진 엄마에게 토일은 더 씩씩하게 말한다.
"왜? 좋을 수도 있으니까 하잖아. 아니면 이혼하지 뭐. 왜? 우리도 잘 살고 있잖아."
엄마도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
토일과 엄마가 나란히 손을 잡고 식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비추며 영화가 끝난다.
"미친년 속곳 가랑이 빠지듯."
여성의 옷차림을 흉잡을 때 쓰는 우리말 속담이다. 미친 여자가 옷을 단정하게 제대로 여미지 않아서 속바지가 겉으로 삐져나온 상태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세상에, 옷차림이 좀 자유롭다고 미친년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게 옛날 옛날이야기이기만 할까? 여성으로 살아 보면 안다. 내 옷차림이란 내 개성대로 나 입고 싶은 대로 입을 수 있는 자기표현보다는 여차하면 흉 잡힐 수 있는 빌미에 가까웠다.
포털에서 찾아보았다. '미친년에 관한 속담'을 치면 15개가 주르륵 나왔다. "미친년 속곳 가랑이 빠지듯" 말고도 "미친년 치맛자락"도 있었다. 여성은 옷차림 하나로 쉽게 미친년이 될 수 있었다. "미친년 널뛰듯" "미친년 방아 찧듯", 조금만 활기차고 행동이 자유로워도 다 '미친년'이란다. 그럼 '미친놈에 관한 속담'은 어떨까? 달랑 2개 나왔다. 그나마 둘 다 "자식 추기 반미친놈 계집 추기 온미친놈"이란 같은 의미의 속담이었다. 남자는 자식 자랑하면 흉이지만 아내 자랑하면 완전의 미친놈이 된다. 남자는 목석이란 소리다.
아들 결혼식장에서 예복으로 입을 생활한복을 사고 나니 떠오른 게 '미친년'이었다. 아주 잠깐 욕먹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스쳤다. 그리곤 토일이와 호훈의 결혼식 장면이 떠올랐다. 신랑을 향해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토일이와 까만 바지 양복의 엄마, 그리고 두 아빠가 보였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한복 입은 신랑 아빠가 보이고 아빠를 위로하는 투피스에 단발머리 신랑 엄마도 보인다.
혼인예식에서 신랑신부 엄마들이 같은 머리 같은 한복 안 입어도 좋기만 하구먼.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잔치 분위기가 보이는가? 공장에서 찍어낸 올림머리 말고 내 흰머리에 얇은 두건 하나 쓰고 생활한복 입은 신랑 엄마 내 모습이 보인다. '미친년 속곳 가랑이 빠지듯' 옷 입고 활개치며 잔치 즐기는 내가 보인다.
오늘은 12.3 내란 1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오늘처럼 영하의 추운 날씨에 국회 앞에서 진행 중인 "12.3 내란외환청산과 종식 사회대개혁 시민대행진"을 들으며 현장에 가지 않은 미안함을 달래며 쓴다. 반성조차 하지 않는 내란 세력을 향해 함성이 울려 퍼진다. 내란 세력을 완전히 청산하고 내란 이후의 대한민국을 만들 용기가 있느냐고 연사가 묻고 있다. 끝까지 싸우자고 외친다. 그래, 민주시민의 용기가 이긴다.